그 녀석은 친구이기보다 나에게는 원수 같은 녀석이었다.
아니, 우리 동창들에게 모두 원성의 대상은 늘 그 녀석이었다.
녀석이 서울 모 대학 과 수석으로 당당히 합격하자 동네는 올림픽 금메달을 딴 것처럼 난리가 났다.
마을 입구에 누구네 집 아들 모 대학 합격!이라고 먹물로 써서 광고를 했고, 지서 담에도, 딴 동네를 넘어가는 재 마루도 대문짝만하게 써 붙여 놓았다.
남이 잘되는 걸 배 아파 하는 이유를 우리는 일찌감치 깨달았다.
말이 동창이지, 녀석은 우리에게 질시의 대상이 된 것은 어디 그 뿐이 아니었다.
군대를 갔다 오고 결혼 적령기가 됐을 무렵, 그 녀석은 아리따운 도시의 처녀, 그것도 금테 안경을 쓴 뾰족구두를 신은 미모의 여성을 대동하고 마을에 나타났다.
이미 그 아버지의 입을 통하여 마을 전체에 알려졌지만, 나는 주눅이 들어 문틈으로 녀석이 지나는 모습을 봤다.
정말 동네가 환해질 만한 미모였다.
사뿐사뿐 걷는 걸음걸이와 살짝 파마를 한 듯한 그녀의 긴 머리는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지, 동네 전체를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 녀석의 아버지를 통해 이미 모습은 대충 들었지만 상상 밖의 미모는 놀라움이었다.
약주 한 잔 하시면 그 녀석의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에게 꼼짝도 못하셨지만, 자식 자랑이 나오면 아버지께서는 늘 침묵하시며 헛기침만 하셨다.
그 와중에 내게 쏟아지는 부모님 괄시의 시선은 늘 내 마음을 괴롭히곤 했다.
언제나 녀석과 나는 비교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서울에서 녀석이 결혼하는 날은 동네가 텅 비었다.
버스 두 대로 마을 사람들을 몽땅 실어갔다.
동네를 지키는 것은 나와 똥개 몇 마리가 전부인 텅 비어 한적한 길을 보며 녀석에게 퍼부은 저주를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재경 동문회라고 연락을 받고 가 보니 녀석도 어찌 된 일인지 오랜만에 참석했다.
대통령보다 보기 어렵던 녀석인데, 나를 보자 계면쩍은 듯한 표정으로 악수를 내민다.
내민 손을 그냥 둘 수 없어 손을 잡긴 했지만, 녀석만 보면 내 속은 뒤집어진다.
이미 녀석의 부모님이나 우리 부모님 모두 돌아가셨지만, 녀석으로 인해 받은 정신적 상처는 늘 내 뇌리에 박혀있었다.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서 끼리끼리 무리 무리 담소를 나누는 중, 녀석에 대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녀석이 찢어졌다고 했다.
서울 부잣집 딸내미와 결혼해 잘 나가던 녀석이 외톨이가 되어 혼자 산 지 몇 년 됐다고 했다.
두 아이 중 하나는 캐나다에, 하나는 미국에 있다고 했다.
아마, 전 처도 미국에 가 있는 듯하다는 말을 들었다.
어쩐지 녀석 표정이 밝지 않다는 느낌을 받긴 했어도 그렇게 심각한지 몰랐다.
황혼 이혼 ㅡ
육십 대의 후반에 찾아온 황혼 이혼 ㅡ
이혼의 사유가 어디에 있던 녀석은 더 이상 나의 선망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늘 우리에게 주눅이 들게 하던 녀석, 젊은 날 우리에게 결혼의 표본이 되었던 녀석이 초라하게 변해 있었다.
느슨하게 풀어헤친 넥타이,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도 흐트러지고 소주를 들이켜는 속도도 빨라지고 있었다.
초여름 밤은 녀석의 내뱉는 한숨과 함께 깊어가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하늘을 보고 있었다.
드문드문 희미하게 별이 보였다.
고향의 하늘에만 별이 보이는 줄 알았는데, 서울에서도 별이 보이고 있었다.
신기했다.
서울에서도 별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러고 보니 우리는 별을 볼 수도 없이 너무 바쁘게 살아온 것 같다.
가끔 하늘도 보고, 뒤도 돌아보며 살아야 하건만, 우리는 오로지 앞만 보고 살아온 듯했다.
이렇게 치열한 삶을 살고도 우리에게 돌아오는 허무한 종말 ㅡ
녀석은 내게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고 떨어지기 직전의 안경을 치켜올렸다.
녀석은 앞으로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나를 안았다.
나도 술을 마셨지만 유독 녀석의 입에서는 짙은 술 냄새가 풍겨왔다.
"잘 가."
녀석은 다른 말은 하지도 않고 돌아서서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수많은 사람들 속으로 흔들거리며 녀석이 사라지는 모습 ㅡ
축 처진 녀석의 어깨 위로 도시의 불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녀석이나 나나 우리의 모습 속엔 학창 시절의 패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녀석의 모습은 집으로 오는 내내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아내는 내가 온 줄 모르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시츄 녀석이 반가워 뛰어오른다.
사람이 이렇게 반겨주면 얼마나 좋을까!
정신없이 자는 배불뚝이 아내의 모습을 본다.
옆으로 돌아눕는 아내의 궁둥이가 거대하게 클로즈업 되어 온다.
오늘따라 유난히 아내의 궁둥이가 예뻐 보인다.
못생긴 소나무가 고향을 지킨다고, 내 곁에 머물고 있는 아내가 이렇게 소중하게 다가올 수 없다.
와락 껴안고 싶은 충동이 인다.
오늘 밤, 옆구리를 한 번 쿡 찔러볼까?
"하느님!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이 배불뚝이가 곁에 있게 하여 주시와 너무 고맙고 고맙습니다. 아멘."
나는 집에 오자 긴장이 풀렸는지 아내의 옆구리를 찌르지는 않았다.
녀석보다는 내가 더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며 잠 속으로 빠졌다.
나는 이 글이 이혼을 염두에 둔 부부들에게 귀감이 되기 바랍니다.(5447-1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