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이것 참! 야단났다네.
며칠 전 자네와 한 약속을 어길 것 같은데 어쩌면 좋을까?
벌써부터 내 주변에 이상한 기운이 감지됐다네.
무언가 보이지 않는 음침한 기운이 내 주변에서 맴돌고 있음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네.
세상을 살 만큼 살다 보니 부채도사가 되는 듯한 신기(神氣)가 저절로 생기더란 말이라네.
그래서 성급하긴 해도 아내를 볼 때마다 그 기운이 가까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네.
보이지 않는 그 기운은 아무래도 자네와의 약속을 어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
아내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네.
40년을 함께 살다보니 이제는 눈빛만 보면 무얼 계획하고 있는 것 같은 낌새가 역력히 보인다네.
그래서 며칠 아내의 조그만한 행동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네.
아내는 아직도 나를 옛날의 역맛살 있는 남편으로 보는 것 같았지.
소싯적 이야기로 아내께나 울리며 못된 짓을 많이 하고 다니긴 했지.
결혼 후, 20여 일 지나가던 어느 날이던가?
술집 아가씨 팬티를 벗겨온 사건으로 시작된 외도가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해만 갔다네.
급기야 아내가 친정을 간 날 밤, 안방까지 어떤 여인이 습격한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네.
그것을 입 가벼운 어떤 여편네가 떠들고 다녀 온 동네에 소문이 났지 뭔가!
그 발 없는 말은 천릿길을 간다고 아내에게까지 들렸다네.
결혼 전, 이미 그녀와는 결별의 수순을 밟기는 했어도 아내의 귀에 옛날 이야기까지 전해졌다네.
이렇게 말이란 것은 옮겨질수록 눈덩이처럼 커지는 속성을 갖고 있다네.
아내의 입장에서 그 말이 몇 배의 눈덩이로 변한 것이야!
아내는 양잿물을 마시고 자살을 시도하다 미수에 그쳤다네.
양잿물이 아니라, 설탕끼를 없애려고 벽에 매달은 환타찌끄러기 물이였기 망정이지, 정말이라면 오늘의 내가 있었겠나?
목숨이 끊기지 않자 이빨과 손톱으로 공격을 하더군.
지금까지 내 몸 여기저기 그때의 격렬했던 전쟁의 참화가 상흔이 되어 남아 있다네.
그때, 나는 맹세했다네.
다시는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자고!
그러나 나뭇가지는 가만히 있으려 해도 지나가는 바람이 가만 두지 않듯, 주변의 악당들은 끈질기게 유혹의 손길을 보냈다네.
그 후, 몇 번인가 죽을 고비를 넘겨 오늘까지 온 나였기에 감회가 새롭다네.
그런데 자네와 전국을 일주한다고 하니, 아내의 의심병이 도진 게야!
미국여행을 간 8박9일을 휴업하고 떠나려던 내 계획을 수정해야 될 것 같단 말이라네.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지는 않았겠지.
그것은 다 자네가 세상을 성실하게 살지 않은 결과가 내게 돌아왔다는 기분은 어쩔 수 없이 든다네.
며칠 전, 아내는 문구점에 가서 붓이며, 팔렛트며, 여러 그림도구를 사왔다네.
그리고 아주 비싼 그림 물감을 사오기에 무슨 용도로 쓰려나 했다네.
오랫동안 생각한 나는 아주 흡족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어.
옛날 학창시절에 그림을 그리는 소질이 있었다기에 새로운 신사임당이 나오려는 듯 기분이 좋았다네.
사랑하는 내 아내가 예술을 하는 고상한 직업을 갖는다는 뿌듯한 자긍심 ㅡ
내 아내도 남들처럼 한 편에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된다?
그러면 우리 생활도 윤택해질 뿐더러 예술가의 남편이란 타인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될게 아닌가!
일단, 예술가가 된다면 마음씨가 부드러워지겠지!
그 깊은 세계에 몰입하다 보면 남편이란 존재에 관심은 멀어지고 예술에 집중하겠지.
자연히 나는 자유로움을 갖게 될 것이고, 부와 명예까지 덤으로 얻는 행운아가 될 게 분명했다네.
그런데,,, 이상하게도 '데생'도 없이 여러 장의 종이에 나비를 열심히 그리더군.
대게 비싼 값을 받으려면 풍경화나 누드를 그려야 돈이 되는데, 흔한 나비를 왜 그리고 있을까?
나의 생각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비를 그리는 의도를 모르겠더란 말이지!
그 나비는 '설총'이 벽화에 소나무를 그리자 참새가 날아와 부딪혀 죽었다는 설화처럼 생동감 있는 실물 같았다네.
금방이라도 종이에서 튀어나와 하늘 높이 날아갈 것 같은 실물 같은 모습이었다네.
나비 그림이라도 저 정도면 돈이 될 것 같다는 속물근성은 흐믓한 마음으로 가득했다네.
나는 아내에게 꿀물을 타주면서 더욱 그림에 정진하라고 아낌없는 지원을 하고, 방해하지 말자고 TV소리도 이어폰을 끼고 들었지.
돈을 잘 벌지 못하는 나와 가정경제를 위해 고생하는 아내를 도울 내조가 그런 것밖에 더 있겠냐 말이야!
눈물이 흐르더군.
저런 착하디 착한 아내를 미국여행을 보내고 자네와 전국을 다니며 몹쓸짓을 구상했던 내 자신이 미워지더군.
염라대왕은 무얼 하시는지, 이런 놈을 잡아가지 않으시고!
아내는 며칠째 그림방(?)에서 수백 마리의 나비를 그린 후 경건한 모습으로 거실로 나오더군.
눈동자가 하나님 모습처럼 푸른빛이 감도는 신성한 모습이었다네.
소파에 앉더니 손을 씻고 오라고 말했다네.
영문도 모르는 나는 고생하는 아내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네.
아내가 깨끗해진 내 손톱에 나비를 그리더군.
사람들이 보면 메니큐어를 칠한 것처럼 보기 흉하니 하지 말라고 했다네.
아내는 조용히 말했다네.
연습일 뿐, 곧 지운다고 했다네.
나비는 서서히 완성되어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화려한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네.
그 형상은 호랑나비였고, 마직막 하얀 점을 몇 개 찍자 드디어 완성된 것이야!
어떻게 이 좁은 손톱에 호랑나비를 그릴 수 있는지 놀라웁기만 했다네.
나는 아내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네.
이런 나비 수천 마리를 커다란 화폭에 담으면 몇 억은 가지 않을까 하는 계산부터 나오더군.
"여보! 우리 이걸 커다란 화폭에 그리자!"
나는 그 동안 고생한 아내의 어깨를 주무르며 위대한 걸작을 만들어보자고 말했다네.
그러나 아내는 조용한 미소를 띈 모습으로 말했지.
"내가 나비를 어디에 그리려고 연습한 줄 모르지요?"
그리고 아내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지.
나의 눈동자를 한참 보던 아내는 의미심장한 듯 이제까지의 의도를 말하더군.
나는 아내의 말을 듣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네.
내가 지금 누구의 말을 듣고 있지?
친구!
슬프다네.
너무나 슬프다네.
"내가 지금 지구에 있는가?"란 강한 의문이 들 정도의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네.
아내는 내 몸 어디에 그림을 그려놓고 미국을 간다는 게야!
차마 내 입으로 말 못할 은밀한 부위, 신체에서 가장 예민한 그곳의 끝에 나비를 그린다는 것이라네.
한 술 더 뜬 아내는 나비를 그린 후 인증샷을 찍어 두겠다는 거라네.
점이 지워졌는지, 나비의 날개가 움직였는지 사진을 찍어두겠다는 엄청난 음모를 이야기 했다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또 한 마디 더 하더군.
콘돔 속의 미끌거리는 화학성분이 묻으면 자연히 지워질 물감이라고 말하더군!!
그것을 쓸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는 경고까지 말하더군.
그런 특수한 물감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네.
세상에!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중세시대에 십자군으로 가는 사내들이 아내에게 정조대를 채웠다는 말은 들었어도 남자에게 이런 정조대를 채우다니!!
이런 기가 막힐 엄청난 구상을 하고 있는 아내에게 그동안 얼마나 흐믓해 했단 말인가!
걸어다닐 때 팬티에는 절대 지워지지 않는 물감을 발명한 녀석은 어떤 녀석일까?
내가 이런 인격적 모독을 받아가며 살아야 할까?
친구!
아내에게 이런 모독을 받아가며 자네와 무슨 전국일주를 할 마음이 생길까!
지금, 나는 슬픔에 빠져 죽고만 싶은데 어쩌면 좋겠느냐 말이야!
잘있게!
내게 여행이란 '여'자도 꺼내지 말게.
안 보이면 영원히 떠난 줄 알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