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벌초를 가야 하는데....!!"
아버지께서 발을 다치셔서 벌초 걱정을 하시며 하신 말씀이었다.
군에서 휴가 나온 녀석에게 차마 벌초를 하고 오라는 말씀을 못 하시는 것 같았다.
"제가 다녀올게요!"
아버지께서는 숫돌에 잘 간 낫을 주시며 미안한 생각이 역력하게 보였다.
낫 한 자루, 내가 먹을 음식, 간단한 제수 음식을 싸 들고 길을 나섰다.
아침 일찍 가야 덥지 않게 재를 넘을 수 있기 때문에 동 트기 전에 떠나야 했다.
잿마루에 올라서자 아람드리 소나무 가지 사이를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요란하다.
멀리 동강이 지렁이가 기어가듯 구불거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재를 넘어 한참 가자 동강을 건널 때마다 기다리던 주막집이 보인다.
이미 나보다 먼저온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 빨리 좀 와!"
강 건너에서 이마에 수건을 두른 사공인 듯한 남자가 자갈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기다림도 없이 쉽게 건널 수 있었다.
노와 삿대를 번갈아 움직인 배는 금방 건너왔지만, 갈 때 건널 생각에 다다르자 걱정이 태산이다.
할머니 산소를 찾아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오랜 기억을 더듬어 서너 뼘 되는 돌 비석을 찾아 벌초를 했다.
그 돌 비석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잊을까 봐 내가 주워 세운 비석이었다.
속옷이 땀에 흠뻑 젖었다.
그늘에 누워 하늘에 흐르는 구름을 본다.
막걸리를 한 잔 마신 피로 때문일까!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시계도 없던 나는 잠에서 깨어나자 서둘러 구보를 하기 시작했다.
강을 건널 생각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뱃삯을 낸 것도 아닌데, 끊기기라도 하면 커다란 낭패를 겪어야 한다.
아는 집도 없이 강을 못 건너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여서 정신없이 당도했다.
아까처럼 몇 분이 기다리고 있었고, 이내 뱃사공이 왔다.
그분들도 벌초를 온 듯했다.
사람들이 뱃사공에게 돈을 걷어 건네고 있었다.
얼마를 내야 하는지 몰라 주머니를 뒤적이자 뱃사공이 말했다.
"군발이가 뭔 돈 있겠어? 그만 둬!"
뒤통수를 긁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강을 건너왔다.
이제 천천히 서너 시간만 걸으면 집으로 갈 수 있다.
뱃삯도 주지 않고 건너왔다는 안도감과 긴장이 풀려 주막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 잔 마시면 먼 길 가기 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집 간 누나 나이 비슷한 새댁 같은 주막집 아주머니가 반색을 하신다.
군대처럼 '라면땅'으로 소주를 한 병 마실까, 목마름을 추길겸 막걸리를 마실까 고민 끝에 막걸리를 주문했다.
금방 담은 것 같은 김치와 함께 찌그러진 노란 주전자가 나왔다.
군화를 벗고 싶었다.
뜨거운 발을 식힐 겸, 땀에 젖은 양말을 햇볕에 널고 마루 위로 올라갔다.
"총각은 어디 살아?"
마루보다 훨씬 낮은 부엌에서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며 주막집 아주머니가 한 말이다.
"역전에서 왔어요!"
강기슭에서 물결에 부서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얼굴을 본 적 없는 할아버지가 건너셨고, 할머니가 건너셨고, 내 아버지가 건너셨을 동강 기슭은 알 수 없는 애잔함이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내가 얼굴을 본 적 없는 할머니 산소를 얼마나 올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이 교차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나도 한 잔 줘 봐! 총각!"
아주머니가 대접을 들고 마루 위를 올라오고 있었다.
어느새 한 주전자가 비워졌다.
취기는 올랐지만, 요기 서린 듯한 아주머니의 눈빛은 한 주전자만 더 마시자고 유혹하는 듯했다.
"한 되만 더 주세요!"
"괜찮겠어?"
나는 말 없이 웃으면서 주전자를 드렸다.
"곧, 해가 질 텐데...!!"
마루를 오르며 아주머니가 걱정되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산골, 그리고 강촌의 해는 빨리 저문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강기슭 어디에서 뻐꾸기가 울고 있었다.
동강가에는 언제나 해질 무렵이면 뻐꾸기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큰 소나무 가지 사이로 석양이 마지막 빛을 눈부시게 비추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여기 혼자서 주막집을 하고 계세요?"
"왜? 그게 궁금해?"
"밤이 되면 무서울 것 같아서요."
"아니, 아저씨 있어! 읍내 장에 가서 모레는 돼야 올 거야!"
그녀는 해가 진 산마루를 보며 단숨에 들이켰다.
젓가락 없이 손으로 김치를 입에 넣고 다시 대접 가득 막걸리를 따르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 여기 남포불 켜면 모기가 많이 와!"
그녀는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저씨인 듯한 남자와 함께 찍은 흑백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다.
포마드를 발라 넘긴 이마가 좁은 남자는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아직 웃고 있겠지, 그 남자는....!!
어둠이 짙은 잿마루까지 뛰어온 나는 보이지 않는 동강을 바라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자고 가도 돼! 오늘 아저씨 안 와!"
남포불빛 밑에 하얀 배와 검은 음모를 드러낸 여자가 말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지를 입는 나를 치켜보며 한 말이었다.
나는 그녀의 완강한 힘에 쓰러지면서 누가 금방이라도 들어와 몽둥이를 휘두를 것만 같은 두려움만 느꼈다.
취기 오른 내 머릿속은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도, 쾌감 따위도 없었다.
어서 이 행위가 끝나기를 간절하게 바랐던 기억 뿐이었다.
나는 양말도 신지 않은 채 잿마루를 향해 구보보다 더 빨리 뛰었다.
그리고 누가 나를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 며칠을 머물다 첫휴가를 끝내고 귀대했다.
그리고 제대를 하고, 바쁜 세상을 허덕이며 오랜 시간이 지나갔다.
나는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으려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
결혼도 했고, 두 아이가 태어났다.
몇 해 전, 할머니 벌초를 가다 그 주막집을 보았다.
오래 전, 주막집은 사라지고 잡초만 무성했다.
그녀가 썼을 갈라터진 나무 절구통이 우거진 대마 풀숲 속에 보였다.
그때 강을 건네주던 뱃사공도, 나룻배도 사라져 시멘트 토관으로 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물어볼 사람조차 없는 고즈넉한 강변엔 그때 울던 뻐꾸기 몇 대 후손일 녀석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곳에 주막집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돌 담으로 쌓은 집터였을 것이란 모습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잡초 우거진 그늘 속에서 하얀 그 아주머니의 얼굴인 듯한 환상이 보였다.
그 아주머니와 나와의 사랑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사라진 주막집처럼 동강을 타고 멀리멀리 사라져 기억조차 아득하기만 했다.
그 아주머니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주막집에서 얼마나 많은 남자와 사랑을 나누었을까?
나는 그녀와 사랑한 한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몇 해 전, 동창회에서 그녀와의 사랑을 자랑스레 말한 녀석이 있었다.
몇 해 전에 죽은 녀석이다.
그 녀석이 젊은 시절, 나루터 주막집 아주머니와 사랑을 한 것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녀와 방으로 들어간 이유가 어쩌면 나와 똑같았을까!
그녀에게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오래 전 어리숙한 군발이의 모습이 보였다.
술상을 들고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과 모자를 들고 따라 들어가는 군발이가 보였다.
하얀 허벅지가 드러난 채 농익은 콧소리가 유별났던 그녀의 짙은 눈썹이 보였다.
그녀가 그립다는 생각보다 분함과 미운 생각이 들었다.
나만의 아름다운 꿈을 도둑맞은 듯한 배신감까지 드는 것이었다.
그 녀석을 생각하면 아주머니를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이미 다 지나간 이야기다.
그녀를 만난 동창 녀석도 이젠 그리움 속에 머물러 있다.
세월이 지나면 모두가 잊히는가 보다.
내 인생도 이젠 기억이 희미해지는 그 시절의 아버지가 사셨던 세대를 살아가고 있다.
내 아들이 증조 할머니의 산소까지 벌초를 이어갈 수 없는 시대가 됐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나는 아직은 낫을 들고 할머니 벌초 때문에 그 주막집 앞을 지나간다.
오래 전,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지만, 내게는 할머니 산소를 벌초해야 할 의무가 이어지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사연이 얽힌 잿마루를 넘어 굽이치는 동강가에서 난 깊은 상념에 젖는다.
가을이 오면 나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온다.
올해도 누구를 만날 것이다.
누구를 만날까?
얼굴도 모르는 조부모님 외에 부모님도 만나고 먼저 간 형제도 만날 것이다.
싫든 좋든 그 주막집 아주머니도 만날 것이다.
동강 물결과 사라진 주막집터를 바라보며, 보고 싶기도 했던 그 주막집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주전자를 들고 마루를 오르던 그 아주머니, 술상을 들고 방으로 앞서 가던 그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얀 광목 저고리, 까만 치마, 잘록한 허리와 넓게 보이던 궁둥이의 여인 ㅡ
무슨 이야기가 오갈까?
아무튼, 나는 많은 사람들과 벌초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어서 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기를 기다린다.
바쁜 도시를 떠나 애틋한 그리움 가득한 고향으로 가고 싶은 인간의 본능 때문 만은 아니다.
사라진 주막집과 그 여인은 벌초를 갈 때마다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동창 녀석으로 생겼던 여인을 향한 미움도 사라졌다.
어리숙한 군발이에게 막걸리를 부어주던 여인.
흐릿한 남포 불빛 어린 그 여인의 야릇했던 눈빛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