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비비고 돌리던 청춘, 오래된 포도주로 깊어 가다
(초여름 밤, 고교 동창들과의 술자리에서)
글 / 은율 장 기 주
좁은 접시 위, 올망졸망 놓인 꼬치 안주 틈새를 비집고 나오려 애쓰는 초록색 소주병. 제 자리를 찾지 못해 삐딱하게 서 있는 그 모양새가, 어쩌면 세상이라는 틈바구니 속에서 치열하게 버텨온 우리의 실루엣을 닮았다. 조심스레 병목을 쥐고 기울어진 잔에 소주와 맥주를 한데 부어 넣는다. 초여름의 청량한 공기를 타고 쏴아 일어나는 하얀 거품 위로, 쨍하는 유리 부딪히는 소리가 맑게 퍼진다.
낮 동안 찌푸렸던 열기를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이 주막집 야외 벤치 사이로 불어온다.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낙엽 구르는 것만 봐도, 서로의 얼굴만 마주 보아도 자지러지던 고교 시절의 그 짓궂던 동무들이 바로 내 앞에 앉아 있다. 저마다의 삶을 버텨낸 훈장 같은 거친 주름이 손등 위에 얹혔지만, 술잔을 맞부딪치는 순간만큼은 시간이 마법처럼 거꾸로 흐른다.
눈을 감으면 그 시절의 풍경이 여전히 선명하다. 너나 할 것 없이 통 넓은 나팔바지를 펄럭이며 교실 바닥이 닳도록 트위스트 춤을 추던 기억이 손에 잡힐 듯 또렷하다. 소풍날이면 무거운 야외전축을 서로 나눠 들고 가 푸른 잔디 위에 틀어놓고는, 세상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리듬에 맞춰 온몸을 흔들어 대곤 했다. “비비고 돌리고 돌려!” 신나는 가사에 맞춰 발끝을 비벼대던 청춘들. 치직거리는 레코드판 바늘 소리 사이로 터져 나오던 우리들의 깔깔대던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듯하다. 넘어지면 아프기보다 부끄러운 게 먼저였고, 다가올 미래는 온통 핑크빛일 줄만 알았던 눈부신 시절이었다.
그러나 거울 속에는 어느덧 부모라는 이름표를 지나 부쩍 나이 든 낯선 얼굴이 서성이고, 우리는 서로의 흰머리를 들추며 장난스레 세월을 놀려대지만, 붉어진 눈시울 속 야속함까지 전부 숨기진 못한다. 그렇게 뜨겁고 찬란했던 청춘의 하루해는 시원한 초여름의 밤하늘 속으로 다시금 저물어 간다.
조용히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주름진 눈가로 번지는 미소를 본다. 지나온 세월의 매콤함과 씁쓸함, 삶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낸 대견함이 녹아 있는 미소다. 외형은 변하고 세상이 매긴 등급은 달라졌을지언정,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만우절의 장난기 가득했던 그 시절 그대로다. 지치고 힘들 때 돌아갈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 서로라는 사실이, 살랑이는 바람을 타고 문득 고맙다.
이 온기 가득한 술잔과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어주는 친구들이 있기에 다가올 날들이 서글프지만은 않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달콤쌉싸름한 소맥 한 잔에 오늘 하루의 아쉬움과 세월에 대한 미련을 털어낸다. 우리는 그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포도주처럼 서로의 온기를 채워가며 함께 깊어가는 중이리라. 밤바람 속에서 여전히 철부지 같은 친구들을 향해, 다시 한번 잔을 높이 부딪쳐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