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살, 나 영국 유학생이었음
히드로 공항 입국심사 줄 서 있는데
앞에 지수 닮은 토끼상 누나가 있는 거야
주황색 비니 쓰고 중단발에 너무 예쁜 거임
말 걸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누나가 먼저 나한테 왔어
내가 입고 있던 영국 대학교 복싱부 후디 보고
유학생인 거 눈치챈 거지
입국 서류 작성 어떻게 하냐고
도와주다 보니까 영어도 잘 못하고
짐 찾는 컨베이어도 반대로 가려 하고 ㅋㅋ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유럽 여행 혼자 온 거임
알바해서 모은 돈으로 대학 졸업 전에
버킷리스트 이루러 온 거라고
걱정돼서 유심이랑 지하철 카드까지 같이 사주고
시내 들어가는 것까지 다 알려줬어
혹시나 해서 카톡 줬는데
기숙사 돌아왔을 때 연락이 왔고
말이 너무 잘 통하는 거야
이 기회 놓치기 싫어서 우리 학교 투어 오라고 꼬셨음
런던 밖이긴 한데 관광지이기도 하고
학생만 들어갈 수 있는 곳도 보여줄 수 있으니까
누나도 런던 볼 거 다 봤다고 오겠다 했고
학교 구경시켜주고, 맛집 데려가고
헤어질 시간 다 됐는데 너무 아쉬운 거야
펍 가서 맥주 한 잔 하다가 나 급발진 터짐
"너무 말도 안 되는 인연인데 이렇게 놓치기 아깝다"고 했더니
누나도 똑같은 말을 하는 거야
근데 여기서 반전이 있었어
누나가 다음 날 프랑스로 넘어가는 일정인데
그거 취소하고
그냥 나랑 더 있을까 고민 중이라는 거임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지
근데 힘들게 모은 돈인데 그건 아닌 것 같아서
내가 다음 주 강의 빠지고 내가 따라가겠다고 했음
바로 유로스타 끊었고, 다음 날 파리에서 다시 만났어
한인 민박 도미토리 따로 잡고
진짜 학생 같은 여행이었는데 그게 또 너무 좋은 거야
누나는 나한테 많이 의지했고
중간에 핸드폰 도난도 당해서
같이 경찰서 가고 보험 처리까지 했음
그렇게 에펠탑 올라갔을 때 고백했는데
차였음
어떻게 이 관계를 풀어가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고
한국 가서 다시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어
근데 더 슬픈 건 그 다음이야
헤어지고 나서도 연락이 잘 됐거든
누나 친구들도 나를 좋게 봤고
한국 가서 만날 날만 기다렸는데
막상 한국 오니까 내가 흔들린 거임
유학 중에 파티, 새로운 여자들, 대시도 몇 번 받다 보니 기고만장해진 거지
누나 만나면 그런 기회들 놓치는 게 싫었던 거야
비겁하게도
결국 그렇게 흐지부지 끝나버렸고...
그리고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공항에서 우연히 챙겨주다가 파리까지 날아간 게 이미 영화인데
결국 내 발로 걷어찬 거잖아 🥲
4년 뒤 얘기는 나중에 풀게
너네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 것 같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