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였다.
창가에 놓인 유리컵 속 얼음은 다 녹아 있었고,
누군가 읽다 만 책은 엎어진 채 잠들어 있었다.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는데
바람이 들어올 때마다 책장이 한 장씩 넘어갔다.
아무도 넘기지 않았는데도.
문득
예전에는 기다리는 일이 더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지는 오는데 며칠이 걸렸고
사진은 찍고 나서도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었고
보고 싶은 사람은 곧바로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도착한 것들은 대개 조금 특별했다.
서랍 깊은 곳에는
누렇게 바랜 종이 한 장과
빛이 바래버린 사진 몇 장이 아직 남아 있다.
그것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가끔 꺼내어 보는 날이면
종이 냄새 속에서
잊고 지냈던 계절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온다.
해가 기울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조금 어두워질 무렵
나는 문득 알게 된다.
낭만이라는 건
무언가를 간직하는 일이 아니라
사라진 것들이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는 풍경이라는 것을.
그리고 밤이 되면
그 풍경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불을 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