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을 옮기는 이 순간,늦은 오후의 공기가 애매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어딘가 하루가 끝나지 않은 것 같은 시간.
나는 연천에 있는 부모님 집에 가기 위해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때,멀리서 익숙한 옆모습이시야에 들어왔다.
지순이었다.
혼자 정류장 벤치에 앉아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류장 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잠깐 망설이다가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여기서 보네요.”
지순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를 알아보자가볍게 눈을 크게 뜬다.
“아… 안녕하세요.”
어색하지도, 그렇다고 반갑지도 않은적당한 거리의 인사였다.
나는 그녀 옆에 앉아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잠깐의 정적.
그 정적을 깨듯가볍게 말을 꺼냈다.
“집에… 친오빠 오셨던데요?”
지순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친오빠요? 저 오빠 없는데요…”
그 말을 듣는 순간,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다시 물었다.
“분명히… 주인아줌마한테 엄마라고 부르던데요.”
지순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혹시 이름이 뭐였어요?”
“최씨 아저씨가 그분을 ‘최형’이라고 불렀어요.”
그 말을 듣자지순의 표정이 풀렸다.
“아하… 그 오빠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친오빠는 아니고 친척이에요.
그 오빠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저희 집에서 같이 살았거든요.”
잠깐 숨을 고르고 덧붙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엄마라고 부르게 된 거예요.지금도 가끔 들러요.”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렸다.
괜한 상상이었나 싶었다.
하지만 아직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최형 씨가 최씨 아저씨한테삼촌이라고 부르던데요.그분이랑도 친척이에요?”
지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아빠 아는 동생이에요.”
그리고 짧게 웃었다.
“그냥 편해서 그렇게 부르는 거죠.”
듣고 보니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괜히 의미를 붙이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때, 멀리서 버스 한 대가천천히 정류장으로 다가왔다.
지순이 버스를 보며 말했다.
“버스 왔네요.”
자리에서 일어나며가방을 고쳐 멨다.
“저 학교 가야 해서… 먼저 갈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심히 가세요.”
버스 문이 열리고지순이 올라탔다.
창가에 앉은 그녀가잠깐 바깥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건 아니었지만,이상하게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버스가 출발하고그녀의 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잠시 후 도착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덜컹거리는 진동이몸을 따라 천천히 올라왔다.
창가에 기대 앉자지나가는 풍경이 길게 늘어졌다.
서울을 벗어날수록건물은 점점 낮아지고,불빛은 드문드문 끊기기 시작했다.
어둠이 깔린 들판과간간이 보이는 비닐하우스.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편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이곳은 더 조용해졌고,어머니 혼자 남은 집은괜히 더 작아 보였다.
농사일로 굳은 손.
근심이 가득한 얼굴.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자주 내려오지 못했다.
아니—
못 온 게 아니라안 온 거였을지도 모른다.
서울에서의 삶도그리 나은 건 아니었으니..
월세는 밀려 있었고,일은 구하지 못해서
결국 떠밀리듯고씨네 과수원까지 흘러 들어왔다.
이게 도망인지,버티는 건지조차이젠 잘 모르겠다.
밤이 깊어서야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익숙한 정적이 집안을 감쌌다.
잠시 후—
지순의 방에서‘딸깍’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형광등이 켜졌다는 걸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머릿속에그 방의 모습이 떠올랐다.
붉게 물든 벽.
왜인지 모르게그 방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이 묘하게 답답해졌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지순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털고내 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욕실로 향하려던 순간—
부엌 쪽에서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발걸음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숨을 죽인 채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그 사람이 오고 나서…귀신이 안 보이는 거, 맞지?”
주인아저씨의 낮은 목소리.
잠시 정적이 흐르고,
“…맞아요.”
최씨아저씨의 무거운 목소리가짧게 이어졌다.
순간, 공기가 식어버린 듯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