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게 눈이 저절로 떠졌다. 지난 밤, 잠들기 전에 자신과 맺은 약속이 간절했나 보다. 푸른 빛이 감도는 새벽 미명이다. 창호지 방문 밖은 아직도 어둑어둑하다. 어둠 속에서 양말을 찾아 신고 조용히 문고리를 쥐고서 방문을 살그머니 열었다. 대청마루를 내려올 때,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었다. 식구들이 혹시 잠깰세라.... 그리고는 검정 고무신을 신고 종종걸음으로 마당을 지나서 대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외양간 앞에 묶어둔 강아지는 명호를 알아보고서 눈을 한번 뜻다가 귀찮은 듯이 다시 지그시 감는다. 대신 꼬리만 무성의하게 살래살래 흔들고 있다. 아직 잠이 더 필요하다는 뜻이다.
"아뿔사! 감꽃을 꿸 지푸라기를 가져오는 것을 잊었네!"
다시 발걸음을 외양간으로 향했다. 아직도 암소는 배를 외양간 바닥에 깔고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 아침 쇠죽을 먹을 시간이 아니라서 커다란 눈망울로 명호를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다. 주인에 대한 존경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주인집 막내 아들이라고 짐승들도 집안 서열을 다 안다. 외양간 구석에 쌓아둔 짚단에서 지푸라기 서너 개를 뽑아서 다시 대문 밖으로 나왔다.
초여름 새벽 안개가 대문 앞 좁은 골목에 자욱하다. 서너 발자국 앞도 보이지 않는다. 짙은 안개를 보니 오늘도 하늘의 햇살이 따가울 모양이다. 그래야 보리가 잘 여물지...봄비도 적당히 내려줘서 보리 밀 농사는 풍년이다. 왠지 자신이 농부도 아닌데 명호의 마음이 흐뭇하다. 옛말에 ’부자 사촌 보다 풍년이 낫다‘는 말이 있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새벽에 동네 고샅길을 혼자서 걷는 것은 왠지 마음을 설래게 한다. 차가운 물기를 듬뿍 머금은 아침 공기의 찹찹함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동네 집집마다 감나무들이 있긴 하지만 명호가 특별히 좋아하는 감꽃이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떨감이 아니라 돌감이라 불리는 작은 감인데 감꽃도 작지만 맛이 순하고 달다. 명호는 이 감꽃을 참 좋아한다. 동네에서 딱 한 그루 밖에 없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 새벽에 먼저 올세라 가슴 두근두근 그리면서 골목길을 나섰다.
새벽 길가 풀섶에서 잠자던 개구리가 발자국 소리에 놀라서 오줌을 ‘찍’싸고 달아났다. 고무신에 개구리 오줌 세례를 받았다. 개구리라는 놈은 도모지 이해할 수 없다. 왜? 도망을 가면서 오줌을 쌀까? 놀라 무서워서일까? 아니면 자기를 방어하는 방법일까? 아무튼 개구리 오줌을 맞으면 기분이 나쁘다. 어느 듯 명호의 발걸음이 돌감나무 아래에 도착했다. 아! 다행히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밤새 이슬이 내려 눅눅해진 흙길 위에 살포시 떨어진 감꽃을 아무도 밟고 지나가지 않았다. 땅 위에는 작고 노란 별같이 벌어진 감꽃들이 앙증스럽게 웃고 있었다. 이슬을 머금어서 신선하다. 명호는 쪼그려 앉아서 얼른 감꽃을 하나씩 주워서 지푸라기 끝에 꿰기 시작했다. 감꽃 하나 위에 또 다른 감꽃들을 가지런하게 차곡차곡 꿰었다. 지푸라기 끝까지 꿰니 이제 노랑 감꽃 목걸이가 되었다. 그렇게 감꽃 목걸이를 세 개씩이나 만들었다.
그때 저 멀리 안개 속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새벽녘에 들에 나가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다. 명호의 손은 빨라지다가 멈칫했다. 부리나케 목걸이를 손에 들고서 일어났다. 몸을 얼른 길가에 있는 헛간 속으로 숨겼다. 사내 아이가 새벽에 땅바닦에 엎드려서 감꽃을 줍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헛간의 두엄이 익어가는 냄새가 고약하다. 외양간의 소의 똥오줌에 절여진 지푸라기와 그 위에 화장실의 똥을 뿌려서 두엄을 발효시키니 익는 냄새가 참으로 고약했다. 손가락으로 코를 쥐고 입으로 숨을 쉬고 있을 때, 동네 아저씨 한사람이 빈 지게를 지고 안개 속으로 지나갔다. 드디어 헛간을 부리나케 빠져나왔다.
감꽃 목걸이를 장독대의 단지 뚜껑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밤사이 이슬이 내려서 차가운 단지 뚜껑 위에는 물기가 헝근하게 배여있어서 감꽃이 시들지 않는다. 아! 이 목걸이를 오늘은 순희 누나한테 꼭 전해주어야 하는데...이 생각을 하니 명호의 얼굴이 금새 뜨뜻해졌다.
그 때 할머니의 방문이 열렸다.
"아니! 맹호야! 이 새벽에 어데 갔나오노?
아침 잠도 많은 녀석이?"
"하할....할매예! 아니라예!
제가 할일이 좀 있어서 나갔다 왔심니더!"
마치 도둑질하다가 들킨 것처럼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나 명호의 눈은 장독대 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늦은 오후, 산모퉁이 삼거리에서 명호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한 길은 읍내 국민학교에서 들어오는 신작로이고 다른 길은 중학교 고등학교로 통하는 산 아래 오솔길이다. 두 길이 만나서 동네로 들어간다.
“누나예! 순희 누나예! 같이 가이시더!”
명호는 자기 보다 몇 발자국 앞서가는 같은 동네 순희에게 뛰어갔다. 흰색 셔츠, 검정 교복 치마에다가 머리칼을 쌍갈래로 땋았다. 눈이 크고 코가 오똑하고 얼굴이 시원시원하게 생긴데다가 성격도 밝고 활달하여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순희는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학생들에게는 쌀쌀맞게 대했다. 명호의 목소리에 뒤를 힐끔 바라보더니 발걸음을 멈춰섰다.
“니? 맹호아이가?
지금 학교 마쳤나? 그런데 무슨 일이고?”
“네! 누나랑 같이 가고싶어서예!”
말하면서도 명호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맹호는 이제 몇 살이고?”
“예! 올해 11살이고 4학년입니더...
그런데 누나는 몇 학년입니꺼?”
“응! 나는 이제 중학교 3학년 아이가! 16살이고…”
순희는 동네에서 딸 다섯 딸부자 집 막내 딸이다. 다섯 딸들이 다 미녀라서 근동에서도 소문이 났다. 순희 누나에게 가까이 다가가니 은은한 화장품 냄새에 기분이 묘했다. 엄마가 바르는 화장품과는 냄새가 다르다. 도대체 이게 무슨 화장품일까? 궁금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는 온통 가방 속에 있는 감꽃 목걸이 생각뿐이었다.
“저...저기 누....누나예!
제가 누나한테 줄 게 하나 있습니다.
쪼...쪼매만 기다려 보이소!”
명호는 얼굴이 빨게지면서 가방을 열었다. 손이 떨려서 가방 안을 여기저기 더듬고 있었다. 순희는 의아한 표정으로 명호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가방 속에서 노랑 감꽃을 꿴 목걸이가 하나 나왔다. 명호는 그것을 순희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꼬? 감꽃 목걸이 아이가?
그런데 이걸 왜 내한테 주는데?
너그 형님이 시켰나?”
“아닙니더!
제가 누...누나에게 꼭 주고 싶어서예!
제가 오늘 새벽에 나가서 만들었습니더!”
“호호호! 그럼 명호야!
이걸 주려고 지금까지 여기서 날 기다렸던거야?
혹시 니 내를 좋아하나?“
명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얼굴이 달아올라 그 자리에 더 이상 서있을 수가 없었다. 오른 손에 가방을 단단히 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순희 누나가 쳐다보는 것을 생각하니 더 빨리 달아나고 싶었다. 머릿속이 하얗다. 빨리 보이지 않도록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길 옆의 보리밭에는 이삭이 벌써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코끝에는 익어가는 보리 냄새가 구수하게 느껴졌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