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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라이프스타일
성공멘토
인증 3회 · 1개월 전
독립운동 때 사용했던 태극기가 동네 산책로에ᆢ
딸 아이와 동네 산책을 하는데 가로등에 실제로 독립운동시 사용했던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네요. 독립기념관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태극기를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당시에 이 태극기를 휘둘렀던 분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 지는 것 같네요.
진관사 태극기ㆍ역사와 함께 보는 완전한 이야기
1. 시대적 배경 — 1910년대 일제강점기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민족 말살 정책을 본격화했습니다. 집회·출판·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고, 일장기 게양을 강제했으며,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헌병경찰제도를 운용했습니다. 이러한 극도의 억압 속에서 1919년 3월 1일, 마침내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폭발했습니다.
3·1운동의 종교계 참여 —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그리고 불교계에서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 두 스님이 참여했습니다. 불교계의 중앙학림(현 동국대의 전신) 학생 승려들도 서울과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습니다.
2. 주인공 — 백초월 스님 (1878~1944)
백초월 스님은 1891년 14세에 지리산 영원사로 출가해 20대에 조실에 오른 당대의 대강백이었습니다. 동국대 전신인 불교중앙학림 초대 강사를 비롯해 범어사·동학사·월정사 등 주요 사찰에서 강사를 역임하며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학승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3·1운동이 발발하자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3·1운동으로 한용운·백용성 스님 등 불교계 지도자들이 일제에 체포되자, 백초월 스님은 불교중앙학림 내에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에도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했습니다.
또한 지하신문《혁신공보(革新公報)를 직접 제작·배포했고, 전국불교도독립운동본부를 설립해 항일 투쟁을 전국화했습니다.
스님은 《화엄경》의 '통만법명일심(通萬法名一心)'이라는 구절에 착안해 '일심교(一心敎)'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전국 사찰을 다니며 항일 이념을 전파했습니다.
독립기념관이 발행한 《항일 의열투쟁사》는 백초월을 한용운·백용성의 활동에 뒤지지 않는 존재로 평가하며, 옥사 순국한 의열사로 신채호·김동삼과 함께 거론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 태극기의 탄생 — 일장기 위에 그린 저항
진관사 태극기의 가장 큰 특징은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의 형상을 먹으로 덧칠해 항일 의지를 극대화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일장기를 태극기로 바꾼 유일하고 가장 오래된 사례입니다.
당시 일제가 강제로 보급한 일장기를 태극기로 바꾼 선조들의 항일 정신을 보여주는 귀한 사료입니다. 한철호 동국대 교수는 "일장기에다가 먹으로 덧칠해 일본에 대한 저항운동,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아주 압축적으로 표현해줬다"고 평가합니다.
크기는 가로 89cm, 세로 70cm이며, 태극의 직경은 32cm입니다. 이 태극기의 4괘는 현재 국기와 비교하면 리·감의 위치가 바뀌어 있는데, 이는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제정한 국기 양식과 동일합니다.
4. 태극기를 숨기다 — 극박했던 그 순간
독립운동에 깊숙이 참여한 백초월 스님은 1920년 초 일경(日警)의 감시가 바짝 조여 오자, 태극기를 비롯한 각종 독립운동 자료들을 칠성각 벽속에 비밀리에 숨겼습니다.
태극기 곳곳의 구멍과 불에 탄 흔적으로 미루어, 1919년 3·1운동 때 실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왼쪽 윗부분이 불에 타 손상된 흔적은 만세운동 현장에서의 급박했던 상황을 고스란히 전해줍니다.
5. 함께 발견된 독립운동 자료들
태극기와 함께 발견된 자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국 상하이에서 단재 신채호가 주필로 참여한 항일신문 《신대한(新大韓) 2·3호 실물이 처음 발견되었고, 천도교 측이 발행한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친일파를 꾸짖는 내용의 《경고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행한《독립신문》등 총 5종 19점이 태극기에 보자기처럼 싸인 채로 나왔습니다.
발견된 신문들의 발행 날짜는 1919년 6월 6일부터 12월 25일까지로, 이를 근거로 태극기는 3·1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즈음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학계에서는 진관사가 1919년 독립운동 연락과 자금 모금을 담당했던 임시정부 연통제(聯通制)의 '서울 불교 연락본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6. 백초월 스님의 최후
1939년 10월, 백초월 스님은 경성에서 만주 봉천으로 가는 일제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 격문을 쓴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후 1944년에는 독립자금 모금 사건으로 또다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습니다. 그해 6월 29일, 해방을 불과 1년여 앞두고 청주교도소에서 순국했습니다. 일제 당국이 시신을 무성의하게 처리해 유해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7. 발견과 현재
2009년 5월 26일, 진관사 칠성각을 해체하는 공사 중 내부 불단과 기둥 사이에서 오래된 보따리가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작업자가 안쪽 벽에서 꽁꽁 싸맨 꾸러미를 찾아냈고, 풀어보니 태극기와 19점의 신문이 있었습니다. 이를 발견한 법해 스님은 "열어보니 태극이 딱 보였고,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뜨거운 눈물만 흘렀다"고 회고했습니다.
90년 가까이 벽 속에 잠들어 있던 태극기는 이렇게 세상에 다시 나왔습니다.
진관사 태극기는 2010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가 2021년 보물로 승격되었습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태극기는 진관사 태극기, 데니 태극기, 김구 서명문 태극기 등 총 3점입니다.
진관사는 백초월 스님의 뜻을 기리기 위해 입구 교차로부터 사찰까지 약 1km 구간을 '백초월 길'로 명명했으며, 최근에는 이재명 대통령이 진관사 태극기를 형상화한 배지를 착용하며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