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처음 만난 건
2017년,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보충수업 때였지. 넌 늘 뒷굽이 다 닳은 똑같은 운동화만 신고 다녔어. 급식비 미납 명단에 네 이름이 있을까 봐 내가 더 조마조마해하며, 매점 소시지 하나를 사도 "나 배불러서 못 먹겠다"며 네 입에 넣어주던 게 우리 연애의 시작이었어.
그때부터였을 거야. 내 머릿속엔 '너는 내가 지켜줘야 할 사람'이라는 공식이 박힌 게.
2019년 - 2021년: 편의점 삼각김밥과 나의 첫 알바비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상황은 비슷했지. 넌 과외니 뭐니 바쁘게 사는 것 같은데 정작 수중에 돈은 늘 없었잖아. 2019년 겨울, 너 전역하던 날 내가 군 적금 깨서 산 커플 패딩 기억나? 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나중에 꼭 성공해서 갚을게"라고 했지.
난 그 말이 너무 애틋해서
2020년 팬데믹으로 알바 자리가 끊겼을 때도 내 비상금 털어서 네 생일 선물 챙겼어. 우린 데이트할 때 주로 편의점에서 1+1 행사하는 도시락을 먹거나, 무조건 가성비 좋은 무한리필 고깃집만 찾아다녔잖아. 친구들이 "너는 왜 맨날 네가 내냐"고 타박해도, 난 네 자존심 상할까 봐 "얘 지금 집안 사정이 좀 안 좋아서 그래"라고 네 편만 들었어.
2023년: 취업 준비와 나의 헌신
작년 이맘때, 네가 취업 준비한다고 고시원 들어갔을 때 기억나? 난 네가 밥 굶을까 봐 반찬 해서 나르고, 독서실비 보태주고... 내 옷 한 벌 사는 건 사치라고 생각했어. 넌 늘 "집에 손 벌릴 처지가 못 된다"며 부모님 원망 섞인 말도 가끔 했잖아. 난 그게 다 진심인 줄 알았어. 네 가난이 곧 나의 아픔이었으니까.
2026년 현재: 부서진 9년의 신뢰
그런데 지난주, 우연히 네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내 세상을 통째로 무너뜨렸어.
네 아버지가 매출 수천억 원대 중견기업 사장님이라며? 네가 말하던 그 '작은 가구 공장'이 사실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그 브랜드의 모기업이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네가 며칠 전 '취업했다'며 출근하기 시작한 곳도
결국 네 아버지 회사였고,
네가 나 몰래 타고 다녔다는 외제차 사진을 봤을 때의
그 기분은... 배신감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해
"나는 네가 돈이 없어서 사랑한 게 아니야. 우리가 함께 이겨내고 있다고 믿었던 그 '시간'을 사랑했던 거야."
너한테 묻고 싶어. 내가 네 주머니 사정 걱정하며 데이트 코스 짜고, 편의점 도시락 먹으며 행복해하던 그 9년 동안 넌 무슨 생각을 했니?
'얘는 참 속이기 쉽네'라고 생각했어? 아니면 '나를 정말 사랑하는지 테스트'라도 해본 거야?
내가 너한테 줬던 건 단순한 데이트 비용이나 선물이 아니었어. 내 20대 전체를 갈아 넣은 헌신이었고, 네 가난까지 안아주려 했던 진심이었어. 그런데 넌 그걸 기만으로 되돌려줬네.
이제 네가 사주겠다는 명품 가방도, 좋은 차도 다 징그럽게 느껴져. 나한테 넌, 더 이상 내가 지켜줘야 할 가난한 소년이 아니라, 타인의 진심을 돈 주고도 못 살 연극으로 소모해버린 비겁한 사람일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