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도 더 된 이야기
20대 중반, 1N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서툰 한국어로 면접을 보러 다니다 괜찮은 법률(변리사) 회사에 대표 비서로 입사했다.
---
## 회사 생활
이 회사에서 약 5년을 일했다. 처음엔 대표도 본받을 부분이 많았고, 업계에서 이름 있는 분이었다.
회사 분위기는 30명이 채 안 되는 인원에 정말 화기애애했다.
**대표 딸** —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서 잘 지냈다. 회사 내 변리사와 비밀 연애하다 밖에서 나한테 한 번 들키고, 이후 결혼·임신해서 육아휴직으로 몇 년간 자리를 비웠다.
**대표 아들** — 몇 년 후 미국 변호사가 되어 입사했다. 사실상 변리사 사무실에 아무 쓸모없는 포지션이었는데, 마음에 들면 잘해주고 마음에 안 들면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이었다. 부하 직원 시켜서 일 다 처리한 뒤 아빠한테 쫄래쫄래 가서 자기가 해낸 일이라며 자랑하는 타입.
**대표** — 이후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1년 후 와이프도 사별. 그 후 스트레스성 병으로 1년간 입원, 병간호해준 여자 부장님과 재혼. 공과 사가 무너진 상태가 됨.
---
## 사건의 시작
나도 연애·결혼하고 1년 후 임신했다. 출산 전 육아휴직으로 자리를 비울 계획이었다.
임신 5~6개월쯤, 대표 딸이 복직한다며 사전에 회사에 왔다. 롤케이크 한 개를 사 들고.
나는 대표 비서 겸 프론트 자리였기 때문에 간식이 오면 전체 쪽지를 내가 보내는 역할이었다. 그래서 이런 뉘앙스로 보냈다:
> *"***과장님이 롤케이크를 사오셨습니다. 모자랄 수도 있지만 알아서 와서 드세요."*
30명에 롤케이크 하나니까 와서 얼마 안 남아도 당황하지 말고 알아서 드시라는 말이었다. 나쁜 의도도 없었고, 한국말이 짧아서 더 품위 있게 전달할 방법을 몰랐다.
---
## 사건 전개
**다음 날 아침**, 장문의 쪽지가 와 있었다. 시간을 보니 전날 늦은 저녁에 보낸 것이었다.
> *"어떻게 모자라다는 말을 쓸 수 있냐... 그게 할 말이냐..."* — A4 한 장 분량
담당 부장님이 함께 읽고 무시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답장하지 않았다.
대표 딸은 이 일을 오빠(대표 아들)에게 말했고, 대표에게 전달됐다. 이후 생신 기념 회식에서 대표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 *"여러분, 소통을 잘하세요. 누군가 말을 전하면 답을 하세요."*
그 후 분위기가 차가워졌고, 며칠 뒤 이사님이 나를 불러 **권고사직**을 통보했다.
---
## 권고사직 & 이후
그때는 권고사직이 뭔지도 몰랐다. 어차피 느낌이 쎄해서 짐은 이미 다 집에 가져다 놓은 상태였다.
남편한테 얘기했더니 남편 사촌 누나가 노무사였다. 확인해보니 **임산부는 해고할 수 없고, 육아휴직까지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 전화했더니 회사 측에서 나오지 말고 휴직 다 챙겨주겠다고 했다. 그 후로 그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내가 나간 후의 후폭풍:**
- 나와 친했던 변리사님 → "나를 조종한 직원"이라며 해고
- 30년 넘게 일했던 부장님 → 해고
- 회사 에이스들이 대부분 퇴사
육아휴직 막바지에 회사에서 복직 의향을 물어왔다. 일단 하겠다고 했더니, 소문에 의하면 대표 아들이 나를 비서 업무 대신 구석에 자리를 만들어 배치할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했다. 드라마 *미지의 서울*을 보면서 딱 저런 그림이었겠구나 싶었다.
결국 번복하고 안 가겠다 했다. 퇴직금 받고 바이바이.
---
## 9년 후
퇴사 후 몇 달은 분노로 너무 힘들었다. 내가 몇 년 동안 해온 일들이 무시당한 느낌, 내가 모신 대표가 자기 가족 때문에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은 허탈함. 그렇게 잊혀져 갔다.
퇴사 후 9년이 지났다.
올해 초 경기도에서 송파로 이사 왔다. 방학이기도 하고 적응하느라 정신없던 어느 날, 아이랑 자전거를 타고 들어오는데 반대편에서 낯익은 여자가 스쳐 지나갔다. **그 대표 딸이었다.** 소름이 쫙 돋았다.
한 달 후, 신호등에서 또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못 본 것 같았다.
다시 본 순간부터 계속 생각이 난다. 머리가 아프다.
심지어 그 딸의 아들이 같은 학교다. 5~6학년이라 직접 마주칠 일은 없겠지만.
남편은 그냥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그게 쉬운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같은 동네에서 봐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을 우울하게 만든다.
분노인지 뭔지, 마음이 불편해서 이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