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습니다. 꿈을 꿉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며, 마찬가지로 깨어 있는 상태 역시 꿈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이 둘을 첫 번째 꿈, 두 번째 꿈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지고의 실체인 ‘네 번째 상태(투리야)’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나머지 세 가지 상태를 그 위에 나타나는 하나의 화면처럼 바라볼 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깨달은 사람에게는 세 가지 마음의 상태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없습니까?
마음 자체가 의식의 빛 속에 녹아 사라져 버렸는데 무슨 차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실체의 기준은 깨어 있는 상태이지만, 깨달은 사람에게 있어서의 기준은 실체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순수 의식인 실체는 본래 영원하기 때문에 세 가지 상태 모두에서 동일하게 존재합니다. 실체와 하나가 된 사람에게는 마음도, 마음의 세 가지 상태도 없으며, 따라서 내향성도 외향성도 없습니다.
그는 항상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영원한 진아에 대해 깨어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는 늘 꿈꾸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에게 세상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꿈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항상 잠자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에게는 언제나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육체가 나’라는 생각이 없다고요? 그렇다면 예를 들어 선생님께서 벌레에 물리면 감각이 없습니까?
감각도 있고 ‘육체가 나’라는 생각도 있습니다. 그 생각 자체는 누구에게나 있으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육체만이 나’라고 생각하는 반면,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것이 나(진아)이며, 모든 것이 브라흐만이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이 있어도 그대로 두며, 그것조차 진아의 일부이고 진아는 본래 완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육체만이 나’라는 생각을 넘어섰을 때 깨닫게 됩니다. 그 생각이 사라지면 행위나 행위자라는 생각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깨달은 사람에게는 카르마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깨달은 사람이 실제로 체험하는 바이며, 이러한 체험이 없다면 그는 깨달은 사람이 아닙니다.
조회 33
청안거사 (🌲🍁)
3개월 전
♤ 안물안궁 ♤
제목을 [꿈꾸는 자 누구인가!] 하고 물음표 대신 느낌표를 붙여 보았습니다.
일반적인 질문에는 답이 있겠지만 근원적인 질문에는 질문 자체가 답이 되는 체험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음표 보다는 느낌표를 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