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알려면 낮보다 밤이 좋다고들 한다.
낮에는 누구나 제법 괜찮은 사람이다.
정돈된 말투.적당한 미소.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예의.
우리는 낮 동안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직장에서는 직장인으로, 가정에서는 부모로, 사회에서는 괜찮은 어른으로.
그렇게 하루 종일 자신을 단정하게 접어 넣는다.
하지만 밤이 되면 조금 달라진다.그건 알코올 때문이 아니라, 오랫동안 쥐고 있던 것들이 느슨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날 당신도 그랬다.
처음 만났을 때의 당신은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말은 신중했고, 웃음은 적당했고, 감정은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마치 잘 정리된 서랍 같았다.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겠는데 정작 열어볼 수는 없는 사람.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당신은 의외의 이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키우던 강아지 이야기.아버지에게 처음 맞았던 날 이야기.첫사랑 이야기.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끝난 사람 이야기.
신기한 건, 사람은 행복했던 순간보다 후회했던 순간을 훨씬 더 오래 기억한다는 사실이었다.
당신도 그랬다.
잘한 일보다 못한 일을,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을, 사랑했던 사람보다 끝내 잊지 못한 사람을 더 오래 이야기했다.
그때 문득 알았다.사람은 무엇을 사랑하는가보다무엇을 오래 붙들고 있는가로 설명되는 존재라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 나는 당신이 하는 말보다
말과 말 사이의 침묵을 듣고 있었다.웃음이 끝난 뒤 잠시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의 이름이 나왔을 때 아주 짧게 흔들리던 눈빛.
아무렇지 않은 척 물을 마시던 손끝.
사람의 외로움은 생각보다 작은 곳에 숨어 있었다.
재밌는 건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끊임없이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좋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하지만 정말 편한 사람과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창밖을 보고 있어도 괜찮고, 휴대폰을 만지고 있어도 괜찮고, 그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어쩌면 관계의 깊이는얼마나 많은 말을 나누었는가가 아니라,얼마나 편안하게 침묵할 수 있는가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취하면 웃는다.누군가는 운다.누군가는 옛 연인에게 전화를 걸고,누군가는 갑자기 철학자가 된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취할수록 세상을 비난하기보다 자신을 돌아보았다.
남 탓보다 자기 이야기를 했고,억울함보다 미안함을 먼저 꺼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좋았다.
강한 사람보다 솔직한 사람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이가 들수록 누가 잘 마시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새벽까지 버티는 체력보다누가 계산서를 대하는지,누가 먼저 택시를 잡아주는지,누가 끝까지 남아 사람들을 챙기는지가 더 기억난다.
품격은 의외로 그런 곳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이제 사람을 볼 때낮의 얼굴만 보지 않는다.밤의 얼굴도 함께 본다.
말이 많을 때보다 말이 끝났을 때를 본다.
웃고 있을 때보다 웃음이 사라진 뒤를 본다.
그때 비로소
그 사람이 어떤 외로움을 품고 사는지,무엇을 그리워하는지,무엇을 끝내 놓지 못하고 있는지가 보인다.
나는 그날의 메뉴를 기억하지 못한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대부분 잊었다.
다만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다.
사람들 웃음소리가 잠시 멀어졌을 때,당신이 빈 잔을 천천히 만지작거리며끝내 하지 못한 말 하나를 삼키던 모습.
아마 우리는 그날서로의 진심을 들은 것이 아니라,서로의 침묵을 들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관계란, 말해진 것보다끝내 말해지지 못한 것들로
더 오래 기억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