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예나는 봄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봄이 막 시작되는 시기를 좋아했다.
겨울 외투를 벗어도 괜찮을 만큼 따뜻하지만 아직은 조금 쌀쌀한 바람이 남아 있는 날들.
햇빛은 부드럽고 꽃들은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하는 그런 계절.
그래서 옷도 늘 비슷했다.
검은색보다는 밝은 색을 좋아했고, 불편하게 몸을 조이는 옷보다는 움직이기 편한 옷을 좋아했다.
그날도 연한 크림색 원피스 위에 얇은 가디건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친구들은 가끔 예나를 보면 꽃집에서 일하는 사람 같다고 놀리곤 했다.
꽃을 좋아하고.
향수를 좋아하고.
예쁜 카페를 좋아하고.
사소한 것에도 잘 웃었기 때문이다.
예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싫지 않았다.
꽃집 사장님 같은 사람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으니까.
"예나 씨. 지금 몇 시죠?"
약속 장소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예나는 휴대폰을 귀에 대고 웃었다.
"열한 시 오 분."
"우리 약속은?"
"열한 시."
"그럼 지금 어디죠?"
"지하철."
"예나 씨는 항상 당당해서 좋아."
전화기 너머에서 한숨 섞인 웃음소리가 들렸다.
예나는 괜히 따라 웃었다.
사실 조금 늦은 건 맞았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든 것이 용서될 것 같은 날이었다.
친구들과 만나자마자 점심부터 먹었다.
맛집이라고 소문난 파스타 집이었는데 삼십 분을 기다려서 들어갔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웃고 떠들었다.
누군가는 최근에 고백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고,
누군가는 과제 때문에 죽을 것 같다고 했고,
누군가는 새로 산 립스틱 자랑을 했다.
예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다.
사람들 이야기는 늘 재미있었다.
특히 친한 친구들 이야기는 더 그랬다.
점심을 먹고 나온 뒤에는 특별한 계획 없이 거리를 걸었다.
올리브영에 들어가 한참 동안 향수를 맡아보고, 화장품 코너를 돌며 서로에게 어울릴 것 같은 색을 골라 주고, 소품샵에 들어가 귀여운 메모지와 엽서를 구경했다.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즐거웠다.
향수 코너에서였다.
친구 하나가 시향지를 흔들며 말했다.
"이거 맡아봐. 진짜 좋다."
예나는 손목을 내밀었다.
친구가 향수를 한 번 뿌려 주었다.
은은한 꽃향기가 퍼졌다.
예나는 손목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좋았다.
정말 봄 같은 향이었다.
"괜찮네."
"괜찮네가 아니고 엄청 좋지."
"응. 좋다."
"너는 왜 맨날 반응이 그거야."
친구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좋은 건 좋다고 말해."
예나는 웃었다.
"그러니까 지금 좋다고 했잖아."
친구는 결국 포기했다.
그 모습을 보고 또 웃음이 터졌다.
거리에는 꽃을 파는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예나는 무심코 발걸음을 멈췄다.
커다란 꽃다발도 있었고 작은 꽃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안개꽃이 있었다.
작고 하얀 꽃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었다.
예나는 쪼그려 앉아 꽃을 바라봤다.
"예쁘네."
할머니가 웃었다.
"아가씨가 더 예쁘지."
예나는 민망해서 웃었다.
친구들은 뒤에서 키득거리고 있었다.
"얼마예요?"
"이건 이천 원."
예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안개꽃 한 다발을 샀다.
친구가 물었다.
"근데 꽃은 왜 사?"
"그냥."
"그냥?"
"예뻐서."
친구는 고개를 갸웃했다.
"며칠 지나면 시들잖아."
예나는 안개꽃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알아. 근데 오늘은 예쁘잖아."
친구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진짜 이상한 데서 낭만을 찾는다."
예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 맞는 말 같았으니까.
스티커 사진을 찍을 때는 더 정신이 없었다.
포즈를 정하는 데만 몇 분이 걸렸고, 찍고 나서는 누가 제일 이상하게 나왔는지 가지고 한참을 놀렸다.
사진 속 친구들은 전부 웃고 있었다.
예나도 웃고 있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너무 즐겁게.
오후가 조금 늦어졌을 무렵.
친구들은 카페에 들어갔다.
창가 자리였다.
햇빛이 좋았다.
친구들은 음료 사진을 찍고 있었고, 예나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한쪽에 놓인 작은 책장을 구경했다.
책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시를 좋아하는 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표지에는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향기에 대하여>
향기.
예나가 좋아하는 단어였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책을 펼쳤다.
몇 장 넘기다가 한 페이지에서 손이 멈췄다.
어떤 향은
사람보다 오래 남는다.
떠난 뒤에도 곁에 머물고,
잊었다고 생각한 날에도
문득 계절처럼 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가끔
향기가 기억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예나는 한참 동안 그 문장을 바라봤다.
어려운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좋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이야기를 누군가 대신 적어 놓은 것 같았다.
어릴 때 엄마가 쓰던 향수.
할머니 집 장롱 냄새.
비 오는 날의 흙냄새.
꽃집 앞을 지나갈 때 나는 꽃향기.
그런 기억들이 문득 떠올랐다.
"예나."
친구가 불렀다.
"응?"
"뭐 그렇게 열심히 봐?"
예나는 책을 보여주었다.
친구는 시를 읽고 잠시 생각했다.
"시 좋아했어?"
"아니."
"근데 왜 그렇게 진지해."
예나는 웃었다.
"좋아서."
"뭐가?"
예나는 다시 시를 내려다봤다.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설명은 못 하겠는데 그냥 좋다."
친구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좋은 것들은 원래 설명이 잘 안 되는 법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예나는 오늘 찍은 사진들을 천천히 넘겨보았다.
향수를 맡으며 웃던 친구.
소품샵에서 장난치던 친구.
스티커 사진 속의 자신.
카페 창가.
그리고 마지막.
휴대폰에 저장해 둔 시 한 편.
예나는 다시 한번 읽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끄고 창밖을 바라봤다.
노을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손목에는 아직 꽃향기가 남아 있었고, 가방 안에는 오늘 찍은 스티커 사진과 안개꽃 한 다발이 조심스럽게 들어 있었다.
친구들은 여전히 단체 채팅방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예나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오늘은 특별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것도 아니고.
인생이 바뀌는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걸어 다닌 하루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모든 것이 좋았다.
예나는 그 기분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밤.
안개꽃을 작은 유리병에 꽂아 둔 뒤 잠이 들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봄바람이 꽃을 아주 조금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