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예나는 평소보다 조금 조용했다.
웃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손님이 농담을 하면 웃었고, 해원이 장
난을 치면 평소처럼 받아쳤다.
하지만 해원은 알 수 있었다.
사람은 말을 하지 않아도 기분이 보일 때가 있다.
예나는 그런 날이었다.
가게 문을 닫고 둘은 함께 걸었다.
이제는 너무 익숙한 길이었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골목도.
처음에는 길게 느껴졌던 집까지의 거리도.
어느새 일상이 되어 있었다.
한참 동안 말없이 걷던 예나가 문득 입을 열었다.
"오빠."
"네."
"오늘은 집에 들어가기 싫어요."
해원은 걸음을 조금 늦췄다.
"무슨 일 있어요?"
예나는 잠시 웃었다.
"그냥."
"그냥요?"
"오늘은 혼자 있기 싫어요."
해원은 더 묻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을 믿는다는 건.
모든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는 부분도 기다려 주는 것인지 몰랐다.
잠시 뒤.
예나가 다시 말했다.
"오빠."
"네."
"오늘 같이 있을래요?"
해원은 걸음을 멈췄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요?"
"같이 있을래요."
해원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나는 그런 해원의 얼굴을 보더니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왜 그렇게 놀라요."
"아니 그게."
"싫어요?"
"아니요."
대답은 너무 빨랐다.
그래서 오히려 더 이상해졌다.
예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왜 그래요."
"내가 지금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겠어서."
"왜요?"
"잘못 말하면 큰일 날 것 같아서."
예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오빠 진짜 웃겨."
한참 웃던 예나가 말했다.
"나 오늘 오빠랑 있고 싶어요."
이번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해원은 잠시 예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방에 들어온 뒤에도 둘은 한동안 평소처럼 행동했다.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를 땄고.
TV도 켰고.
과자 봉지도 뜯었다.
그런데 둘 다 알고 있었다.
아무도 TV를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무도 맥주 맛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예나는 맥주캔만 만지작거렸다.
해원은 그런 예나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둘 다 웃었다.
긴장이 들킨 사람처럼.
누가 먼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정신을 차려 보니 둘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
예나는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해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얼마 뒤.
예나는 부끄러운 얼굴로 두 팔을 모았다.
해원은 원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긴장을 풀어줘야 하나.
웃겨야 하나.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예나를 보는 순간.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예나는 두 팔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오빠..."
"네."
"계속 그렇게 볼 거예요?"
해원은 웃었다.
"네."
예나는 더 부끄러워졌다.
"민망한데."
"알아요."
"그럼 그만 봐요."
해원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왜요."
해원은 잠시 예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했다.
"너무 아름다워서."
예나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해원도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예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정말 아름다웠다.
어깨에서 시작된 부드러운 선.
목을 지나고.
쇄골을 지나고.
허리를 지나 발끝까지 이어지는 윤곽.
몇 달 동안 매일 보던 사람인데.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아름다웠다.
살면서 예쁜 여자를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아름다운 걸까.
왜 이렇게 눈을 뗄 수 없는 걸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예나라서 그런 것 같았다.
한참 동안 바라보던 해원은 조심스럽게 예나에게 입을 맞췄다.
짧고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긴장을 풀어 주려는 것처럼.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것처럼.
예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해원은 피식 웃었다.
"젠장."
예나도 웃었다.
"왜요."
"첫 키스가 모텔이라니."
예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오빠 책임이잖아요."
"제 책임이요?"
"그동안 용기 못 낸 사람이 누구였는데."
해원도 웃었다.
예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방금은 키스 아닌데."
"그럼?"
"뽀뽀지."
해원은 한참 웃었다.
그리고 예나를 바라봤다.
"그럼."
예나도 해원을 바라봤다.
"네?"
"이제 진짜 키스해 볼까."
예나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그날 밤은 조용히 흘러갔다.
창밖에는 늦은 불빛이 남아 있었고.
방 안에는 서로의 체온만 남아 있었다.
예나는 먼저 잠이 들었다.
많이 지쳤던 모양이었다.
잠든 뒤에도 자연스럽게 해원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해원은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옆에는 예나가 있었다.
몇 달 동안 좋아했던 사람.
퇴근 후마다 보고 싶어서 찾아갔던 사람.
집까지 바래다주던 사람.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품 안에서 잠든 사람.
해원은 한참 동안 예나를 바라봤다.
잠든 얼굴.
흩어진 머리카락.
가끔은 이불을 끌어 올려 주고.
가끔은 품 안으로 다시 안아 주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잠들기 싫었다.
눈을 감으면 시간이 지나갈 것 같았다.
아침이 오면 이 밤이 끝날 것 같았다.
그래서 버텼다.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더 기억하고 싶었다.
살면서 처음이었다.
잠보다 사람이 더 아까운 밤은.
해원이 겨우 잠들었을 무렵.
예나는 먼저 눈을 떴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해원이 보였다.
순간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예나는 조용히 일어났다.
옷을 입고.
가방을 챙기고.
머리를 정리했다.
해원이 눈을 뜬 것은 그때였다.
"벌써 일어났어요?"
예나는 괜히 해원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오빠."
"네."
"미안한데 나 먼저 들어가 볼게."
해원은 멍한 얼굴로 물었다.
"벌써요?"
"응."
"좀 더 있다 가지."
"아니야."
"밥이라도 먹고 가요."
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가방을 어깨에 멨다.
"나 먼저 갈게."
해원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예나를 바라봤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왜 이렇게 급하게 가."
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겨우 말했다.
"그냥."
그리고 문을 열었다.
"갈게."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예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얼굴이 뜨거웠다.
심장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다.
"아..."
짧은 신음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벽에 이마를 기댔다.
내가 어제 무슨 짓을 한 거야.
정말 미쳤나 봐.
생각할수록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은 토마토처럼 빨개져 있었다.
예나는 결국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혼자 남은 해원은 한참 동안 닫힌 문만 바라봤다.
그러다가 침대에 다시 앉았다.
어제 일을 천천히 떠올렸다.
혹시 내가 실수한 게 있었나.
만족스럽지 않았나.
내가 뭔가 잘못한 건가.
괜히 했던 말들을 다시 떠올려 봤다.
장난이 과했나.
분위기를 망쳤나.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걱정과는 별개로 자꾸 웃음이 났다.
침대 위에 남아 있는 예나의 흔적 때문인지.
아직 남아 있는 체온 때문인지.
아니면.
어젯밤이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해원은 한참 동안 침대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