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함께 쓴 날 이후로도 시간은 계속 흘렀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특별한 일이 없었다.
그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예나를 처음 만났을 때는 모든 것이 특별했다.
가게에 가는 일도 특별했고.
인사를 나누는 일도 특별했고.
대화를 하는 일도 특별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예나와 연락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퇴근 후 가게에 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집까지 바래다주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자연스럽다는 건 무섭다.
사람은 익숙해진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니까.
어느 순간부터 해원은 예나가 없는 하루를 상상하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예나가 쉬는 날이었다.
둘은 영화를 보기로 했다.
사실 영화는 핑계에 가까웠다.
영화가 보고 싶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만날 이유가 필요해서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예나는 영화관에 도착하자마자 투덜거렸다.
"오빠는 영화관 팝콘 가격 안 비싸다고 생각해요? 저는 올 때마다 이 돈이면 치킨 한 마리는 먹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해원은 웃으며 팝콘 통을 받아 들었다.
"
그러면 다음부터는 치킨 먹으러 만날까요."
"그건 그것대로 좋긴 한데."
"그럼 문제없네요."
"아니죠. 치킨 먹고 영화도 봐야죠."
"결국 다 하겠다는 거네요."
"당연하죠."
예나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해원은 그런 모습이 좋았다.
예나는 생각보다 욕심이 많았다.
먹고 싶은 것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고.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았다.
다만 그 욕심이 돈이나 성공 같은 방향보다는.
오늘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방향에 가까웠다.
영화가 끝난 뒤 둘은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사실 잘 기억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사람은 대화의 내용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분위기를 기억한다.
예나가 웃었던 순간.
물 마시다가 사레 들려서 기침하던 순간.
자기가 한 말을 스스로 정정하며 민망해하던 순간.
그런 것들이 더 오래 남았다.
"근데 저 진짜 큰일인 것 같아요."
예나가 밥을 먹다가 말했다.
"왜요."
"요즘은 쉬는 날이 너무 기다려져요."
"좋은 거 아닌가요."
"아니요. 원래는 쉬는 날 되면 취업 사
이트부터 켰거든요. 채용 공고 보고, 자소서 수정하고, 그런 거부터 했어요."
"근데요?"
"근데 요즘은 쉬는 날 되면 오늘 뭐 먹지부터 생각해요."
해원이 웃었다.
예나도 따라 웃었다.
"진짜예요. 원래는 쉬는 날이 무서웠는데 요즘은 쉬는 날이 좋아요."
"왜요."
예나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냥 재밌으니까."
그리고 조금 뒤에 덧붙였다.
"오빠 만나면 재밌잖아요."
해원은 괜히 물컵을 들었다.
예나는 그런 해원의 반응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둘 다 웃었다.
며칠 뒤.
야간 작업을 마치고 가게에 갔을 때였다.
예나는 평소처럼 일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손님 하나였다.
처음 보는 손님이었다.
나이도 비슷해 보였다.
그 손님은 술을 주문하면서도 계속 예나에게 말을 걸었다.
예나는 늘 그랬듯 웃으며 응대했다.
그게 일이니까.
해원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손님은 몇 번이나 말을 걸었고.
예나는 몇 번이나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휴대폰을 꺼내는 것 같기도 했다.
해원은 괜히 맥주잔을 들었다.
별일 아닐 수도 있다.
진짜 별일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예나는 예뻤다.
그리고 상냥했다.
그 사실을 자신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해원은 별생각 없는 척 물었다.
"오늘 손님이랑 이야기 많이 하시던데요."
예나는 금방 알아들었다.
"아."
그리고 웃었다.
"질투해요?"
"아닙니다."
"맞네."
"아니라니까요."
"번호 물어봤어요."
해원은 순간 걸음을 멈출 뻔했다.
예나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당연히 안 줬죠."
"제가 언제 줬다고 했습니까."
"오빠 표정이 방금 엄청 심각해졌거든요."
"그건 착각입니다."
"아닌데."
예나는 한참 웃었다.
그리고 해원은 깨달았다.
들킨 건 자신인 것 같았다.
그날 밤.
노트를 펼쳤다.
-일기
오늘은 질투를 했다.
솔직히 인정한다.
별것 아닌 일인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웃긴 일이다.
우리는 사귀는 사이도 아니다.
사귀자는 말을 한 적도 없다.
손을 잡은 적도 없다.
그런데 왜 그런 기분이 드는 걸까.
노트를 덮었다.
그리고 며칠이 더 흘렀다.
오늘도 예나 씨를 집까지 바래다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무슨 관계일까.
거의 매일 연락한다.
시간이 나면 만난다.
영화도 본다.
밥도 먹는다.
집도 바래다준다.
힘든 일이 있으면 서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사귀자는 말은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사귀자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인데.
가끔은 이미 사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또 며칠 뒤.
오늘은 예나 씨가 웃다가 내 팔을 때렸다.
별 이유는 없었다.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웃다가 그런 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루 종일 그게 생각났다.
사람은 원래 이런 걸 기억하는 걸까.
아니면 좋아하면 원래 그런 걸까.
잘 모르겠다.
해원은 펜을 내려놓았다.
창밖에서는 초여름 바람이 불고 있었다.
예나를 처음 만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가게에 가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영화를 보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집까지 데려다주는 것도.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더 헷갈렸다.
좋아하는 건 확실했다.
예나도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문득 궁금했다.
사람은 언제부터 연인이 되는 걸까.
사귀자는 말을 한 순간부터일까.
아니면 이미 서로의 하루를 기다리게 된 순간부터일까.
해원은 답을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알았다.
내일도 일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예나를 보러 갈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