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가게 문이 닫히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처음에는 예나를 보는 것이 좋았다.
그 다음에는 대화하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가게를 나와 함께 걷는 그 시간이 좋아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하루 종일 사람들과 일하고.
시끄러운 현장을 뛰어다니다가도.
예나와 집까지 걸어가는 삼십 분 남짓한 시간은 전혀 다른 하루처럼 느껴졌다.
둘은 거의 매일 만났다.
어떤 날은 해원이 가게에 들렀고.
어떤 날은 예나가 쉬는 날이라 밥을 먹었다.
가끔 영화도 봤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손을 잡은 적도 없었고.
사귀자는 말을 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둘은 서로의 하루를 알고 있었다.
면접이 있었는지.
오늘 현장이 힘들었는지.
점심은 먹었는지.
부모님과 통화는 했는지.
그런 것들을 알고 있었다.
해원은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사람과 가까워진다는 건.
생각보다 거창한 일이 아니었다.
매일 조금씩 상대의 하루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 예보가 있었다.
해원은 현장으로 가기 전에 우산을 챙겼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우산을 하나 더 챙길까 잠시 고민했다.
결국 그러지는 않았다.
그때는 몰랐다.
그 선택을 조금 후회하게 될 줄은.
야간 작업이 끝나고 가게에 도착했을 때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예나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오늘 비 진짜 많이 오네요."
"그러게요."
"오빠 우산 가져왔어요?"
"네."
"다행이다."
해원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는 정말 별생각이 없었다.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 됐다.
예나는 앞치마를 벗고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가게 밖으로 나오자마자 말했다.
"와."
"왜요."
"생각보다 더 많이 오는데요?"
비는 아까보다 훨씬 굵어져 있었다.
해원은 우산을 펼쳤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예나 쪽으로 기울였다.
예나는 아무 말 없이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둘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문제는.
우산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성인 남녀 둘이 나란히 걷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해원은 최대한 우산을 예나 쪽으로 기울였다.
당연히 본인 어깨는 젖기 시작했다.
예나는 처음에는 모르고 걷다가.
몇 분 뒤 걸음을 멈췄다.
"오빠."
"네."
"왜 그렇게 멀리 가요?"
"안 멀리 갔는데요."
"거짓말."
예나는 웃으며 해원의 어깨를 툭 쳤다.
"지금 반은 비 맞고 있잖아요."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
"저 원래 비 좀 맞습니다."
"무슨 비 맞는 게 취미도 아니고."
해원은 웃었다.
그런데 예나는 웃지 않았다.
잠시 해원을 보더니.
갑자기 한 걸음 가까이 붙었다.
정말 갑자기.
해원은 순간 걸음을 멈출 뻔했다.
팔이 닿았다.
어깨도 닿았다.
우산이 작다 보니 거의 붙어 걷는 수준이었다.
예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이제 안 젖죠?"
해원은 대답을 못 했다.
사실 비는 문제가 아니었다.
비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예나의 머리카락 끝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은은하게 샴푸 향이 났다.
팔이 닿았다 떨어졌다.
어깨가 스쳤다.
가끔 걸음이 맞지 않을 때는 몸이 더 가까워졌다.
해원은 괜히 창밖만 보며 걸었다.
심장이 쓸데없이 시끄러웠다.
예나는 그런 해원의 속도 모르고 말했다.
"오빠."
"네."
"추워요?"
"아뇨."
"근데 왜 그렇게 말이 없어요?"
"원래 말이 없잖아요."
"거짓말."
예나는 피식 웃었다.
"나랑 있을 때는 말 많은데."
해원은 결국 같이 웃었다.
그렇게 삼십 분 가까이 걸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예나는 우산 밖으로 한 걸음 나갔다.
"잘 들어가요."
"예나 씨도요."
"감기 걸리지 말고."
"예나 씨가 더 조심해야죠."
예나는 웃었다.
그리고 문득 말했다.
"근데."
"네."
"오빠 진짜 이상해."
"왜요."
"좋은 사람들은 다 그런가."
해원은 이유를 묻지 못했다.
예나는 그냥 웃고 들어가 버렸다.
그날 밤.
해원은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노트를 펼친 뒤에도.
한동안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그러다가 천천히 적었다.
-시
비 오는 날이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진다.
젖기 싫어서인지.
외로운 게 싫어서인지는 모르겠다.
오늘 예나 씨와 같은 우산을 썼다.
정확히 말하면.
예나 씨가 나를 우산 안으로 끌어들였다.
나는 계속 우산을 예나 씨 쪽으로 기울였는데.
예나 씨는 계속 나를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겼다.
덕분에 비는 막았지만.
심장은 전혀 막지 못했다.
집에 와서 우산을 말리다가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작은 우산을 가져올 걸.
그랬다면.
조금 더 가까이 걸을 수 있었을 테니까.
해원은 마지막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예나 씨가 이걸 읽으면.
분명 깔깔 웃을 것 같다고.
그런데 이상하게.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