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현장은 같은 건물 안에서 층만 옮기는 작업이었다.
이전 규모 자체가 엄청 큰 편은 아니었지만 손이 많이 가는 현장이었다.
집기 이동도 있었고 문서도 적지 않았다.
특히 모빌렉 문서 작업이 포함되어 있어서 해원은 아침부터 대충 종료 시간을 네 시 정도로 보고 있었다.
모빌렉은 늘 비슷했다.
사람을 열 명 넣는다고 열 배 빨라지는 작업이 아니었다.
발지에서 한 사람이 문서를 빼고.
착지에서 한 사람이 다시 넣는다.
결국 작업 속도는 착지에서 결정됐다.
그래서 대부분의 팀장들은 착지에 누굴 세울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해원 역시 그랬다.
오늘 착지는 상우였다.
점심시간이 되자 사람들은 하나둘 식당으로 향했다.
해원도 밥을 먹으러 가려다가 모빌렉 쪽을 바라봤다.
상우가 아직도 안에서 문서를 넣고 있었다.
해원은 모빌렉 앞으로 걸어갔다.
"상우야."
상우가 고개를 돌렸다.
"네 팀장님."
"밥 안 먹을 거야?"
상우는 웃었다.
"조금만 더 하고 먹겠습니다."
해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김밥이라도 하나 먹으면서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상우는 문서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에요. 그거 먹을 시간에 하나라도 더 넣고 끝나고 마음 편하게 먹는 게 나아요."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괜찮습니다."
"그러다가 쓰러진다."
상우는 웃었다.
"안 쓰러집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원래 이런 작업은 끝이 보여야 힘이 납니다."
해원은 결국 웃고 말았다.
상우다운 대답이었다.
점심을 먹고 돌아왔을 때도 상우는 여전히 착지에서 문서를 넣고 있었다.
그리고 오후가 되자 현장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졌다.
바구니가 비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원래 같으면 아직 한참 남아 있어야 할 작업량이었다.
승건이도 지나가며 말했다.
"팀장님, 생각보다 엄청 빨리 끝나겠는데요?"
해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 중이다."
기옥이 옆에서 말했다.
"형."
"왜."
"상우 형 오늘 무슨 일 있어?"
"왜."
"집에 가서 소개팅이라도 하나."
"소개팅은 무슨."
"아니면 여자친구 만나나."
그 말을 듣고 있던 상우가 웃었다.
"없어."
"그럼 왜 이렇게 열심히 해."
"빨리 끝나면 좋잖아."
기옥은 한숨을 쉬었다.
"저 형은 재미가 없어."
결국 작업은 오후 두 시에 끝났다.
해원이 예상했던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빨랐다.
사람들은 철수를 하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원래라면 이제 슬슬 끝이 보일 시간이었는데.
이미 정리가 끝나 있었다.
그때 출발지 작업을 마무리한 재헌이 착지 쪽으로 올라왔다.
재헌은 정리된 모빌렉을 보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어? 벌써 다 끝난 거예요?"
해원도 웃었다.
"그러게요. 저도 좀 놀랐습니다."
재헌은 안쪽을 둘러보다가 상우를 바라봤다.
"상우 씨가 넣은 거예요?"
상우는 물을 마시며 웃었다.
"네."
"진짜 밥도 안 먹고?"
"제가 늦으면 다 기다리시잖아요."
재헌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맞는데."
그리고 해원을 바라봤다.
"해원 씨. 이 정도면 상우 씨는 식대 말고 뭐라도 하나 챙겨줘야 되는 거 아니에요?"
해원도 웃었다.
"그래야죠. 원래도 시간 걸리는 작업인데 오늘은 진짜 고생했지."
재헌은 상우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상우 씨. 내가 언제 맛있는 커피 하나 사드려야겠네요."
상우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재헌 팀장님. 저는 몬스터가 제일 좋습니다."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기옥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상우를 바라봤다.
"형 진짜 양심 없다."
"왜."
"커피 사준다는데 몬스터를 말하냐."
"비싼 게 좋은 거지."
"진짜 얄밉다."
상우는 웃으며 말했다.
"일 잘하는 사람은 원래 당당한 거야."
기옥은 인상을 찌푸렸다.
"방금 그 말은 진짜 꼴 보기 싫었다."
현장에 또 한 번 웃음이 번졌다.
작업이 끝나고 차에 올라탄 해원은 한동안 시동을 걸지 않았다.
오후 두 시.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
집에 가서 쉬어도 됐다.
운동을 가도 됐다.
그런데 요즘은 이상하게 일이 끝나면 다른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해원은 휴대폰을 꺼냈다.
예나와의 대화창이 가장 위에 있었다.
잠시 웃음이 났다.
그리고 메시지를 보냈다.
> 오늘도 알바예요?
답장은 금방 왔다.
> 네.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해원은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 저도 오늘 일찍 퇴근했습니다.
잠시 후.
> 그건 아까 들었어요.
> 기억력 좋네요.
> 오빠가 방금 말했으니까요.
해원은 웃었다.
> 그래서 저도 출근하려고요.
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게 왔다.
그리고 도착한 메시지.
> 또요?
> 네.
> 오빠 요즘 거의 개근상인데.
해원은 잠시 생각하다가 솔직하게 적었다.
> 예나 씨 보러 오늘도 출근 도장 찍으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답장이 꽤 늦었다.
한참 뒤에 도착한 메시지.
> 그걸 그렇게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해원은 웃었다.
> 숨겨야 됩니까?
> 그건 아닌데.
> 그럼 됐네.
잠시 뒤.
예나가 웃는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
저녁 무렵.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예나는 익숙한 얼굴을 본 사람처럼 웃었다.
"오늘은 진짜 일찍 오셨네요."
"오늘 현장이 빨리 끝났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미 들었고요."
"그랬습니까."
"네. 두 시에 끝났다고 엄청 자랑하시던데요."
해원은 웃었다.
"그 정도면 자랑할 만하지 않습니까."
"인정."
예나는 웃으며 주문을 받으러 갔다.
그런데 잠깐만 틈이 나도 다시 해원 자리로 돌아왔다.
취업 이야기.
알바 이야기.
오늘 현장 이야기.
별것 아닌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간은 빨리 흘렀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던 사장이 지나가듯 말했다.
"요즘 우리 예나 보러 오는 손님이 많네."
예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걸요."
사장이 웃었다.
"그래. 화이팅."
그러고는 그대로 지나갔다.
해원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예나도 따라 웃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해원은 샤워를 마치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익숙하게 노트를 펼쳤다.
-일기
요즘은 일이 끝나면 다른 일정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예전에는 운동도 가고.
집에서 쉬기도 하고.
가끔은 친구들과 술도 마셨다.
그런데 요즘은 이상하게 하루가 끝나면 한 사람이 먼저 생각난다.
사실 나도 안다.
내가 왜 그 가게에 가는지.
술이 좋아서도 아니다.
안주가 좋아서도 아니다.
예나 씨를 보러 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원래 이런 건가 싶다.
억지로 시간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보기 위해 시간을 만들게 되는 것.
오늘도 예나 씨와 한참 이야기를 했다.
돌아보면 특별한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서로의 하루를 이야기하고.
별것 아닌 농담을 하고.
가끔 진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좋다.
아마 내가 좋아하는 건 단순히 예나 씨의 외모만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예쁘다.
웃을 때도 예쁘고.
목소리도 좋고.
가끔 아무 생각 없이 웃는 모습은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재주가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내가 이렇게 자주 찾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예나 씨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좋다.
생각보다 코드가 잘 맞고.
같은 이야기를 해도 재미있다.
무엇보다 함께 있으면 편하다.
신기하게도 하루 종일 일하고 지쳐 있다가도.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예나 씨 얼굴을 보면 피곤했던 기분이 조금 사라진다.
그게 참 신기하다.
가끔은 나이 차이도 생각한다.
열한 살.
숫자로 적으면 생각보다 크다.
그래서 괜한 기대는 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말리기도 한다.
그런데도.
오늘도 결국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내일도 아마 보고 싶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