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해원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현장이 있는 날이었다.
샤워를 하고.
커피를 내리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평소와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그런데 휴대폰을 집어 드는 순서가 조금 달라졌다.
예전 같으면 뉴스부터 봤을 것이다.
현장 단톡방을 확인하거나.
오늘 작업 위치를 다시 확인하거나.
그런데 오늘은 자연스럽게 카카오톡을 열었다.
강예나.
어제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메시지가 보였다.
잠시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메시지를 보냈다.
> 일어났어요?
보내고 나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삼십 대 중반 남자가 아침부터 뭐 하는 건가 싶었다.
몇 분 뒤.
답장이 왔다.
> 네. 방금요.
> 오늘도 공부해요?
> 네. 해야죠...
> 말줄임표가 불안한데.
> 하기 싫거든요.
해원은 웃었다.
"팀장님."
상우가 차 창문을 두드렸다.
"출발하셔야죠."
"간다."
해원은 휴대폰을 집어넣고 차에 올라탔다.
오늘 현장은 판교였다.
작업량은 많지 않았지만 손이 많이 가는 현장이었다.
회의실 책상도 많았고.
유리 파티션도 있었다.
아침부터 정신없이 움직였다.
"기옥아."
"어 형."
"거기 받쳐."
"받쳤어."
"아니 거기 말고."
"아 여기?"
"그러니까."
옆에서 상우가 웃었다.
"기옥이는 아직 멀었네."
"형은 처음부터 잘했어?"
"나는 원래 잘했어."
"거짓말."
현장에 웃음이 번졌다.
점심시간.
근처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먹었다.
해원은 밥이 나오자 사진을 찍었다.
원래는 안 그러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이상하게 사진을 찍게 됐다.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 점심 (김치찌개 사진)
잠시 뒤.
답장이 왔다.
> 맛있겠다.
> 예나 씨는요?
곧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편의점 삼각김밥
그리고 컵라면.
해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 또 대충 먹네.
> 취업 준비생 무시하지 마세요.
> 그게 자랑인가.
> 반성 중.
해원은 웃었다.
"형."
기옥이 옆에서 물었다.
"왜 자꾸 웃어?"
"안 웃었는데."
"웃었어요."
상우도 거들었다.
"요즘 기분 좋은 일 있습니까?"
"없습니다."
"여자라도 생겼어요?"
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기옥과 상우가 서로를 바라봤다.
"아닌가 보네."
"그럼 말고."
상우는 김치찌개를 떠먹으며 말했다.
"근데 요즘 휴대폰은 진짜 많이 보시긴 해요."
"밥이나 먹어."
"수상하네."
해원은 피식 웃고 말았다.
오후 작업이 끝날 무렵.
예나에게 메시지가 왔다.
> 아직도 일해요?
> 끝나갑니다.
> 고생하셨어요.
해원은 잠시 화면을 바라봤다.
평소 같으면 별생각 없이 지나갔을 말인데.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 공부는 했어요?
> 조금.
> 조금?
> 사실 많이 놀았어요.
> 역시.
> 근데 죄책감 들어요.
> 원래 놀고 나면 죄책감 드는 거예요.
> 경험담인가.
> 맞습니다.
예나는 한참 뒤에 웃는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
저녁.
집으로 돌아온 해원은 샤워를 했다.
그리고 늦은 저녁을 먹었다.
TV를 틀어 놓았지만 내용은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휴대폰이 몇 번 울렸다.
예나였다.
별것 아닌 이야기들.
스터디카페가 너무 추웠다는 이야기.
오늘 옆자리에 코 고는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
자기소개서를 세 번 고쳤다는 이야기.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재미있었다.
열 시가 조금 넘었을 때.
도윤에게 전화가 왔다.
"뭐 하냐."
"집."
"심심한데 술이나 먹자."
"오늘은 됐다."
"왜."
"귀찮다."
도윤은 잠시 침묵했다.
"거짓말."
"뭐가."
"너 원래 집에서 안 쉬잖아."
해원은 웃었다.
"그냥 피곤하다."
"그래."
도윤도 더 묻지 않았다.
"여자라도 생겼냐 했더니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아니다."
"알았다."
도윤은 웃었다.
"생기면 말해."
"없다니까."
"그래."
전화는 금방 끝났다.
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해원은 책상 앞에 앉았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읽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
그 정도의 의미였다.
노트를 펼쳤다.
펜을 들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적기 시작했다.
-일기
좋은 사람을 만나면 시간이 빨리 간다는 말을 예전에는 잘 믿지 않았다.
재미있는 영화나 게임은 이해가 됐다.
하지만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건 최근 들어 조금씩 알게 되고 있다.
오늘도 특별한 일은 없었다.
현장에 갔다.
김치찌개를 먹었다.
집에 돌아왔다.
그게 전부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루가 짧았다.
생각해 보면 사람은 참 이상하다.
똑같은 하루를 살아도 누군가가 들어오면 전혀 다른 하루가 된다.
예나 씨는 재미있는 사람이다.
잘 웃고.
사람 이야기를 좋아하고.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진심으로 반응한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으면 나도 조금 더 말을 하게 된다.
평소의 나라면 굳이 하지 않았을 이야기들까지.
좋은 사람이라는 건 그런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조금 더 솔직해지게 만드는 사람.
오늘 하루도 생각보다 오래 남을 것 같다.
해원은 펜을 내려놓았다.
원래라면 여기서 끝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지막 문장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오늘 하루도 생각보다 오래 남을 것 같다.'
해원은 노트를 덮으려다가 다시 펼쳤다.
그리고 빈 페이지를 넘겼다.
-시
-당신이라는 풍경
사람은 이상하다.
어떤 사람은 몇 년을 알아도 기억에 남지 않는데
어떤 사람은 몇 번 보지 않았는데도
자꾸 떠오른다.
오늘도 그랬다.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손을 흔들던 사람.
커피를 마시며 웃던 사람.
매운 떡볶이를 먹으며 괜히 뿌듯해하던 사람.
별것 아닌 장면들인데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
생각해 보면
예쁜 사람은 많았다.
좋은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나는 왜
당신이 웃을 때마다
괜히 따라 웃고 있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나는 몇 번이나
오늘의 장면들을 다시 꺼내 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는 것은
어쩌면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사소한 장면들이 자꾸 생각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해원은 노트를 덮었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강예나.
> 아직 안 자요?
해원은 웃었다.
> 예나 씨도요?
곧바로 답장이 왔다.
> 저도 아직이요.
짧은 대화였다.
별것 아닌 메시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둘 다 잠들기 전에 서로의 이름을 한 번 더 확인하게 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