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민은 언제부터인가 날짜를 세지 않게 됐다.
처음에는 달력을 보며 며칠이 지났는지 확인했다.
재판은 언제인지, 앞으로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지, 바깥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자꾸만 계산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어차피 간다.
내가 세든 세지 않든.
내가 기다리든 기다리지 않든.
그래서 어느 날부터는 그냥 포기했다.
대신 생각이 늘어났다.
너무 많이.
지나칠 정도로.
사람은 바쁘게 살 때는 자기 자신을 잘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밥을 먹고, 피곤해서 잠들다 보면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이 별로 없다.
그런데 여기서는 달랐다.
생각할 시간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결국 생각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
왜 그랬을까.
나는 왜 그랬을까.
재민은 수도 없이 그 질문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답이 쉬운 것 같았다.
그 애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조롱했으니까.
비웃었으니까.
사과하지 않았으니까.
사람을 끝까지 몰아붙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화가 났고 결국 터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같은 생각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하다 보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
처음에는 확신이었던 생각이 조금씩 흔들린다.
정말 그것 때문이었을까.
정말 그 애들만의 문제였을까.
만약 그날 그 애들이 조금 덜 비웃었더라면.
만약 그날 내가 조금 덜 지쳐 있었더라면.
만약 영업정지가 없었더라면.
만약 가게가 잘되고 있었더라면.
만약 대출 걱정이 없었더라면.
만약 집에 아픈 부모가 있었더라면.
만약 아이가 없었더라면.
인생은 이상하게도 수많은 만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만약을 다 걷어내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결국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병을 든 것은 나였다.
그 사실은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았다.
재민은 그게 괴로웠다.
사실 그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 익숙
한 사람이 아니었다.
살면서 원수라고 부를 만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싸움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누군가를 증오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나는 왜 그 정도까지 갔을까.
정말 죽이고 싶었던 걸까.
그 질문은 오랫동안 재민을 따라다녔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답을 모르겠다.
그 순간에는 정말 죽이고 싶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정말 그 사람이 죽기를 바랐던 건지, 아니면 내 고통을 알아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그냥 멈춰 달라고 외치고 싶었던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사람은 분노하는 순간 자기 감정조차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연구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사람은 생각보다 자기 자신을 모른다고.
그때는 남 이야기인 줄 알았다.
지금은 안다.
그 말이 누구보다 자기 이야기였다는 것을.
재민은 평생 자기 자신을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선한 사람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남을 해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것 역시 오만이었던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자기가 정의롭다고 믿고 싶어 하고, 자기가 상식적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 사람이라면 왜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다툼이 있을까.
왜 모두가 자기는 피해자라고 말할까.
왜 모두가 자기 입장에서는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할까.
재민은 처음으로 인간이 무서워졌다.
가해자들이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뉴스에 나오는 범죄자들이 무서운 것도 아니었다.
자기 자신이 무서웠다.
나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
그게 가장 무서웠다.
그리고 그 두려움 끝에서 재민은 또 하나를 깨달았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무너진다.
그런데 생각보다 오래 버티기도 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없이 화났고, 수없이 억울했고, 수없이 누군가를 원망했지만 그때마다 선을 넘지는 않았다.
그날은 넘었다.
하지만 그 전날까지는 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선함이 아니라 어쩌면 끝까지 버티려는 의지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재민은 처음으로 가해자 생각보다 아내 생각을 더 오래 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의 후회는 조금 다른 모양이 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