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일곱시 반.
해원은 법무법인 건물 앞에 서서 도면을 펼쳐 들고 있었다.
사무실 이전은 시작하기 전이 가장 중요했다.
작업이 시작되면 정신이 없어진다. 사람은 움직이고, 가구는 쏟아져 들어오고, 직원들은 자기 자리를 물어보고, 관리사무소는 엘리베이터 시간을 확인하러 온다. 그래서 시작 전에 머릿속에 현장이 전부 들어 있어야 했다.
해원은 도면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대표변호사실.
파트너 변호사실 네 개.
회의실 두 개. 서고. 직원석. 탕비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는 서류였다.
법무법인은 일반 회사와 달랐다.
컴퓨터나 책상보다 종이가 더 많았다.
그것도 버릴 수 없는 종이들.
몇 년 전 사건 기록부터 현재 진행 중인 소송 서류까지 수천 권이 넘게 쌓여 있었다.
잠시 뒤 트럭이 도착했다.
사람들도 하나둘 모였다.
해원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 뒤 도면을 펼쳤다.
"다들 잠깐 모여 봐."
시끄럽던 현장이 잠시 조용해졌다.
해원은 도면 위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오늘은 일반 사무실처럼 하면 안 된다. 책상보다 서류가 훨씬 문제다. 서류는 나중에 넣으려고 하면 절대 시간 안 나온다."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법무법인 현장을 해 본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순서 바꾼다. 장 들어가는 대로 바로 서류 넣기 시작해. 순서 생각하지 말고 일단 채워. 나중에 다시 정리하는 게 훨씬 빠르다."
그리고 사람들을 둘러봤다.
"상우하고 기옥은 신규 사무실 배치 들어간다. 장 자리 잡고 회의실 테이블 조립 먼저. 회의실 끝나면 대표실 가구."
"네."
"승건, 지용은 서류 전담. 서류 올라오는 대로 장 채우기 시작해. 다른 거 하지 말고 그것만 해."
"알겠습니다."
"승민하고 한구는 대표변호사실. 거기 끝나면 파트너실 지원."
해원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개인짐이랑 의자는 맨 마지막이다. 알지? 그거 먼저 올리면 복도 막혀서 나중에 다 두 번 옮겨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몇 번이나 들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그 몇 번이나 들었던 이야기가 가장 중요했다.
작업이 시작되자 건물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물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가구가 올라가고.
서류 박스가 쏟아졌다.
해원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회의실에 갔다가.
대표실을 확인하고.
다시 엘리베이터 앞으로 나왔다.
"거기 장 조금만 왼쪽."
"회의실 TV 높이 다시 맞춰."
"서류 복도에 쌓지 마. 사람 막힌다."
"그 책상 방향 반대야."
지시가 계속 이어졌다.
누군가는 기업이사를 단순히 짐 옮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사람 열 명이 움직이면 열 가지 생각을 한다.
그걸 하나의 방향으로 맞추는 일이 더 어려웠다.
오전 열한 시쯤.
대표변호사실이 거의 마무리되고 있을 때였다.
법무법인 대표변호사가 다가왔다.
"팀장님."
"네."
"커피 한 잔 하시죠."
해원은 잠시 시계를 봤다.
작업 흐름은 안정적이었다.
잠깐 자리를 비워도 괜찮았다.
"좋습니다."
창가 쪽 작은 회의실.
대표변호사는 종이컵에 커피를 따라 주었다.
둘은 잠시 현장 이야기를 했다.
일정.
가구.
배치.
그런 평범한 이야기.
그러다가 변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현장 관리가 쉽지 않죠?"
"사람 관리가 제일 어렵습니다."
해원이 웃으며 말했다.
"가구는 말 안 듣는 척이라도 하지 사람은 진짜 말 안 듣거든요."
변호사가 웃었다.
"그건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침묵.
해원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문득 재민 생각이 났다.
며칠 전 접견실.
초라하게 웃던 얼굴.
재판장.
판결.
가게를 정리했다는 이야기.
새벽에 일을 나가기 시작한 아내 이야기.
그런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변호사님."
해원이 말했다.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뭡니까."
"일하시면서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선을 넘는 경우 많이 보십니까."
변호사는 잠시 해원을 바라봤다.
질문 의도를 어느 정도 눈치챈 것 같았다.
"친구 이야기입니까."
해원은 작게 웃었다.
"그렇습니다."
변호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봅니다."
"많습니까."
"생각보다 훨씬."
변호사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살인범이나 강도 같은 사람을 떠올리면 원래부터 특별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
"근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술자리 싸움."
"......"
"이혼 과정."
"......"
"채무 문제."
"......"
"주차 시비."
"......"
"인터넷 댓글 다툼."
해원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의외로 시작은 사소합니다."
변호사가 말했다.
"그런데 그 사소한 것들이 쌓이다가 어느 순간 선을 넘죠."
"그럼 그런 사람들은 원래 폭력적인 사람입니까."
변호사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아닐 때도 많습니다."
잠시 침묵.
"그래서 무섭죠."
해원은 시선을 내렸다.
재민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자 변호사가 말을 이었다.
"제가 오래 일하면서 느낀 게 하나 있습니다."
"뭡니까."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자기를 정당화합니다."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변호사는 계속 말했다.
"상대가 먼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위험해집니다. 그때부터는 화낼 이유가 생기고, 복수할 이유가 생기고, 상처 줄 이유가 생기거든요."
"......"
"그리고 사람은 자기 이유를 발견한 순간부터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기 시작합니다."
회의실 밖으로 나왔을 때 작업은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회의실도 완성됐고.
대표실도 정리됐고.
서류도 대부분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해원은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벽에는 변호사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형사. 민사. 이혼. 상속. 노동. 손해배상.
수많은 사건들.
수많은 갈등들.
수많은 원망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악의가 존재했다.
뉴스에 나오는 극단적인 범죄가 아니라.
일상 속 악의.
누군가를 비웃는 악의.
누군가를 이용하는 악의.
누군가를 무너뜨리고도 책임지지 않는 악의.
그리고 그런 악의는 생각보다 흔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악의를 참고 살아가고 있기도 했다.
억울해도 참고.
분노해도 참고.
미워해도 참고.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었다.
어쩌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건 선함이 아니라 그 마지막 선일지도 몰랐다.
해원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오늘 하루도 수많은 책상과 의자와 서류를 옮겼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무실을 옮기며 살아왔지만 정작 사람의 마음은 한 번도 옮겨 본 적이 없다는 생각.
재민도 바꿀 수 없었다.
가해자들도 바꿀 수 없었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원은 인간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재민을 버리지 않은 도윤이 있었고.
태윤이 있었고.
끝까지 친구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원은 트럭 문을 닫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리는 사람을 바꾸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도 아닐지 모른다.
다만.
누군가가 무너질 때 완전히 혼자가 아니게 만드는 것.
그리고 내가 조금 덜 잔인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그것뿐인지도 모른다고.
그날 저녁.
임해원은 연구회의 마지막 질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