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원이 나타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재민은 가게 때문에 바빴고, 태윤은 학교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도윤도 회사 생활에 치여 살고 있었다.
모두가 바쁘다는 이유로 연락이 뜸해졌지만 이상하게도 어색하지는 않았다. 원래 그런 사이였다.
몇 달을 안 보다가도 만나면 어제 헤어진 것처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
재민이 맥주잔을 들며 말했다.
"근데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너는 뭐 하느라 그렇게 바빴냐.
우리는 그래도 대충 이유가 보이잖아. 나는 장사하고, 태윤은 학교 다니고, 도윤은 회사 다니고. 근데 너는 맨날 바쁘다고만 하고 설명을 안 해."
해원이 웃었다.
"별거 없었다. 일도 했고 사람도 만나고 그랬지."
"사람?"
재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여자?"
도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있었네."
태윤도 웃었다.
"몇 명 만났냐."
"왜 그런 게 궁금하냐."
"궁금하니까 물어보는 거지."
해원은 한참 웃다가 말했다.
"생각보다 많이 만났다."
"이 자식 봐라."
재민이 혀를 찼다.
"우리는 네가 산속에서 도 닦고 사는 줄 알았는데."
"무슨 산속이야. 사람 만나고 연애도 하고 여행도 가고 다 했다."
"그래. 그게 더 인간적이라 다행이다."
분위기는 한동안 가벼웠다.
강릉에서 만났던 여자 이야기도 잠깐 나왔다.
태윤은 처음에는 부정했지만 결국 연락을 꾸준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재민은 그런 태윤을 신나게 놀렸다.
"나는 진짜 신기하다. 강릉에서 헌팅하겠다고 설치던 놈이 제일 먼저 연애할 것 같아."
"연애 아니다."
"그 말을 하는 놈치고 연애 아닌 경우를 못 봤다."
한참 웃음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도윤이 휴대폰을 꺼냈다.
"근데 이건 봤냐."
화면에는 기사 하나가 떠 있었다.
길에서 쓰러진 사람을 구조한 시민이 오히려 가해자로 의심받아 몇 달 동안 조사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아무 혐의도 없다는 결론이 났지만 댓글은 이미 난리가 난 상태였다.
'그러니까 사람을 도우면 안 된다.'
'요즘 세상에 괜히 나섰다가 인생 망친다.'
'앞으로는 신고만 하고 지나가겠다.'
그런 댓글이 수백 개씩 달려 있었다.
재민은 기사를 다 읽고 나서 말했다.
"솔직히 나는 저 댓글들이 더 무섭다."
"왜?"
도윤이 물었다.
재민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기사 내용도 내용인데, 사람들 반응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흘러가는 게 좀 그렇다. 물론 저 사람 억울했겠지.
나라도 화났을 거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결론이 '앞으로는 사람 안 돕는다'가 되는 건 이상하지 않냐."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이해하는데 나는 또 저 사람들 욕은 못 하겠다."
"왜?"
"솔직히 무섭잖아."
도윤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회사 다니다 보면 그런 생각 많이 한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정의롭지 않다기보다 생각보다 겁이 많다.
다들 자기 삶을 지키느라 바쁘거든. 만약 내가 누군가를 도와줬는데 그 일 때문에 경찰서 오가고 회사에 소문 나고 몇 달 동안 고생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솔직히 나도 망설여질 것 같다."
재민은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도윤의 말도 이해됐기 때문이다.
태윤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학교도 비슷하다. 나는 오히려 저 기사 보면서 학생들이 떠올랐다."
"왜?"
"괴롭힘을 당하는 애를 보고도 모른 척하는 애들이 있다.
예전에는 그게 비겁하다고만 생각했다.
근데 막상 학교 안으로 들어와 보니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더라. 괜히 끼어들었다가 다음 표적이 될 수도 있고, 친구들 사이에서 이상한 애 취급받을 수도 있으니까.
결국 그 애들도 손해를 두려워하는 거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태윤은 말을 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모른 척하는 게 옳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사람이 선한 행동을 안 하는 이유가 악해서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대부분은 무섭고 귀찮고 손해 보기 싫은 거다."
그때까지 해원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재민이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해원은 잠시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저 기사 때문에 사람들이 사람을 안 돕게 됐다고는 생각 안 한다."
재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원래도 잘 안 도왔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분위기가 순간 바뀌었다.
재민은 바로 반응했다.
"그건 좀 너무 간 거 아니냐."
"왜."
"사람을 너무 나쁘게 보잖아."
해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사람을 나쁘게 본다기보다 현실적으로 보는 거다.
생각해 봐. 모르는 사람을 돕는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시간을 써야 하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돈까지 들어간다.
그런데 사람들은 원래 자기 삶이 가장 중요하다.
나도 그렇고 너희도 그렇다. 그건 악한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도윤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해원은 계속 말했다.
"근데 사람은 또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래서 누군가를 돕지 않았을 때도 이유를 찾는다.
저런 기사를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거다.
'봐라. 내가 안 도운 게 맞았다.'라고.
나는 오히려 그게 더 무섭다."
재민이 말했다.
"그럼 너는 사람들이 선하지 않다고 생각하냐."
해원은 잠시 생각했다.
"나는 사람들이 선하다고도 생각 안 하고 악하다고도 생각 안 한다."
"그럼 뭔데."
"선해지려고 노력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해원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감동받는 건 선한 사람이 아니다. 선한 선택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길에서 누가 쓰러져 있으면 망설일 수 있다.
귀찮을 수도 있고 무서울 수도 있다.
근데 그런 감정이 있었는데도 결국 도와줬다면,
나는 그게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착해서 도운 게 아니라 망설임을 이기고 도운 거니까."
태윤이 조용히 말했다.
"선한 사람보다 선한 선택."
"응."
"그 말은 좀 좋네."
해원은 웃었다.
"사람을 믿으면 실망할 때가 많다.
근데 사람이 내리는 선택을 보면 생각보다 괜찮을 때가 있다."
재민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결국 인정하듯 웃었다.
"진짜 오랜만에 왔는데 또 골치 아픈 이야기만 하고 가네."
해원도 웃었다.
"그래서 너희가 나를 부른 거 아니냐."
그날 연구회는 새벽이 넘도록 계속됐다.
누구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남았다.
사람은 선한가 악한가가 아니라.
망설이는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는가.
어쩌면 그게 더 중요한 질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