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해원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눈을 떴다.
쉬는 날이었다.
원래 같으면 한 번 깨도 다시 잤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강예나.
어젯밤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메시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별것 아닌데 괜히 한 번 더 읽게 됐다.
해원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씻고.
커피를 내리고.
옷을 갈아입고.
시계를 봤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미쳤네."
혼잣말이 나왔다.
그냥 떡볶이 먹기로 한 것뿐인데.
괜히 신경이 쓰였다.
결국 해원은 약속 장소 근처에 이십 분쯤 일찍 도착했다.
골목을 한 바퀴 돌고.
편의점에 들어갔다 나오고.
담배도 한 대 피웠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강예나.
> 저 도착했어요.
해원은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 저도 근처입니다.
그리고 약속 장소로 걸어갔다.
횡단보도 건너편에 서 있는 예나가 보였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가게에서 보던 검은 앞치마도 없었고.
바쁘게 움직이며 주문을 받는 모습도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대학생 같았다.
아니.
생각보다 더 어려 보였다.
가게에서 처음 봤을 때도 어려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밖에서 만나니 진짜 학생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평소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고.
훨씬 많이 웃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예나가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예나 씨가 더 먼저 오셨는데요."
"저는 원래 약속 있으면 일찍 오는 편이에요."
"좋은 습관이네요."
"오빠는요?"
해원이 웃었다.
예나도 웃었다.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감사하죠."
"다행이다."
"왜요."
"해원 씨라고 부르려니까 뭔가 어색해요."
"그건 인정합니다."
둘 다 웃었다.
생각보다 자연스러웠다.
마치 원래 그렇게 부르던 사람처럼.
"가요."
"네."
예나가 앞장섰다.
"진짜 맛있어요."
"벌써 네 번째 듣고 있습니다."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이에요."
"기대하겠습니다."
골목 안쪽에 있는 작은 분식집이었다.
테이블은 많지 않았고.
동네 사람들이 자주 오는 것 같은 가게였다.
예나는 익숙하게 주문했다.
떡볶이. 튀김. 순대.
그리고 어묵까지.
"많은데요."
"저 원래 잘 먹어요."
"그건 알 것 같습니다."
"언제요?"
"떡볶이 이야기할 때."
예나가 웃었다.
"들켰네."
음식이 나오고.
둘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취업 준비는 얼마나 하신 거예요?"
해원이 물었다.
예나는 잠시 생각했다.
"거의 일 년 정도?"
"길었네요."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예나는 웃으며 말했지만.
그 안에는 피곤함도 조금 섞여 있었다.
"원래 전공은 뭐였어요?"
"심리학과요."
"의외네요."
"왜요?"
"사람 관찰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서."
예나가 웃었다.
"그건 맞아요."
"원래 사람 이야기 좋아해요."
"그래서 커뮤니티도 좋아하고."
"댓글 보는 것도 좋아하고."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할까."
"그런 거 생각하는 것도 재밌고."
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예나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울은 취업 때문에 올라온 거예요?"
"네."
"대학교도 지방에서 나왔고."
"친구들도 다 지방에 있어요."
"그럼 서울에는 친구가 거의 없겠네요."
"거의 없어요."
예나는 떡볶이를 집어 들었다.
"그래서 좀 외로운 편이긴 해요."
"혼자 살아요?"
"아니요."
예나가 고개를 저었다.
"원래는 혼자 살았는데."
"얼마 전에 엄마가 올라오셔서 지금은 같이 지내고 있어요."
"아."
"그래도 친구는 없어요."
예나는 웃었다.
"엄마랑은 아무래도 친구랑 하는 이야기랑 다르잖아요."
"그렇죠."
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예나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쵸?"
"커뮤니티 이야기하면."
"엄마는 그런 걸 왜 보냐고 그래요."
"댓글 이야기하면 시간 낭비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하고."
해원이 웃었다.
"부모님들은 보통 그렇죠."
"그래서 더 신기해요."
"뭐가요."
"오빠요."
예나는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이런 이야기 할 사람이 진짜 없거든요."
"커뮤니티 이야기."
"댓글 이야기."
"사람 이야기."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할까."
"왜 저 사람은 저런 댓글을 달았을까."
"그런 거."
"친구들 만나면 보통 연애 이야기하고."
"취업 이야기하고."
"회사 이야기하잖아요."
"근데 저는 그런 것도 재밌단 말이에요."
"그래서 맨날 이상하다는 소리 들어요."
해원이 웃었다.
"조금 이상한 건 맞습니다."
"거봐."
예나가 바로 웃었다.
"또 이상하대."
"근데 저도 보잖아요."
"그러니까 더 신기한 거죠."
예나는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같은 사연 보고."
"같은 댓글 보고."
"그걸로 한 시간 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없어요."
"친구들도 다 관심 없거든요."
해원도 인정했다.
팀원들이나 지인들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커뮤니티 사연 하나를 가지고 한 시간을 떠들 사람들은 아니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예나가 웃었다.
"다행이다."
"뭐가요."
"나만 이상한 사람은 아닌가 봐."
"그건 아직 모릅니다."
"아 진짜."
둘은 또 웃었다.
떡볶이를 다 먹고.
근처 카페로 옮겼다.
커피를 마시면서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사람.
최근에 읽은 글.
기억에 남는 사연.
대화 주제는 계속 바뀌었지만 이상하게 끊기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이야기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예나가 시계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벌써 여섯 시예요?"
해원도 시계를 봤다.
진짜였다.
"그러네요."
"와."
예나가 웃었다.
"진짜 오래 있었네."
"그러게요."
"재밌었나 보다."
해원도 웃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예나는 창밖을 보다가 문득 말했다.
"오빠는 좋은 사람 같아요."
해원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요?"
"그냥."
예나는 웃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인지는 모르겠고."
"그냥."
해원은 괜히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살면서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들어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 말이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둘은 지하철역 앞에서 헤어졌다.
"오늘 재미있었어요."
"저도요."
"다음에 가게 놀러 오세요."
"그래야죠."
"언제 오실 건데요?"
"글쎄요."
"오시면 서비스는 없습니다."
"그럼 안 갑니다."
예나가 웃었다.
"오세요."
"생각해 보겠습니다."
"분명 오실 것 같은데."
"왜요?"
"그냥."
예나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밤.
해원이 집에 도착해 씻고 침대에 누웠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강예나.
> 집 잘 들어가셨어요?
해원은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 네. 예나 씨도요?
곧바로 답장이 왔다.
> 네.
잠시 뒤.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 오늘 재미있었어요.
해원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답장을 보냈다.
> 저도요.
곧바로 답장이 왔다.
> 다음에 오시면 오늘 못 한 이야기 해요.
> 어떤 이야기요?
> 커뮤니티 포함 이런저런 이야기요.
해원은 웃었다.
> 알겠습니다.
> 약속했어요.
> 네.
그날은 그게 끝이었다.
통화도 없었다.
대신 잠들기 전까지.
해원은 몇 번이나 휴대폰 화면을 켰다 껐다 했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강예나라는 사람이.
생각보다 자주 떠오르기 시작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