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민의 결혼 이후 연구회는 예전처럼 자주 모이지 못했다.
태윤은 학교에 적응하느라 바빴고.
도윤은 회사 생활에 정신이 없었고.
재민은 결혼 준비가 끝나자마자 가게 자리를 알아보느라 하루가 짧았다.
그럼에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시간을 맞춰 얼굴을 봤다.
신기하게도.
시간이 없어서 못 만나는 날은 있어도 만나고 싶지 않아서 안 만나는 날은 없었다.
그날은 도윤이 먼저 화를 내고 있었다.
평소에는 비교적 차분한 편인 도윤이었지만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재민이 물었다.
"무슨 일 있었냐."
도윤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회사 사람 이야기다."
"상사?"
"아니."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거래처."
태윤이 웃었다.
"벌써 거래처 욕하는 직장인이 됐냐."
도윤도 피식 웃었다.
"나도 이런 이야기 하는 사람이 될 줄 몰랐다."
그리고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며칠 전.
도윤은 거래처와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날 회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조로웠다.
문제도 없었다.
분위기도 좋았다.
회의가 끝나고 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 길이었다.
그때 거래처 직원 한 명이 지나가듯 말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편하게 일해서 좋겠어요."
정말 아무렇지 않은 말투였다.
농담처럼.
웃으면서.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왜."
재민이 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잖아."
도윤은 잠시 생각했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집에 가는 길에 계속 생각나더라."
도윤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왜 기분이 나빴을까."
태윤도 관심이 생긴 표정이었다.
"그래서 이유를 찾았냐."
"찾았다."
도윤은 웃지도 않았다.
"그 사람은 나를 모르는데 나를 판단했더라."
잠시 침묵.
도윤은 말을 이어갔다.
"내가 얼마나 일하는지 모르고. 무슨 고민을 하는지 모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모르고. 근데 나이만 보고 결론을 내린 거지."
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는 됐다.
도윤은 계속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는 이유가 비슷한 것 같더라."
"어떻게."
"상대를 알기 전에 결론부터 내리는 거."
태윤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학교도 그렇다."
"무슨 일 있었냐."
태윤은 씁쓸하게 웃었다.
"학부모 상담 갔는데 어떤 부모님이 그러더라."
"뭐라고."
"'요즘 선생님들은 편하죠.'"
도윤이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재민도 웃었다.
"야. 오늘 같은 사람 만났네."
태윤도 웃었다.
"진짜 웃긴 게."
잠시 말을 고르더니 다시 이어갔다.
"그분도 나를 모르고 한 이야기였을 거다."
재민도 말했다.
"나는 아직 가게도 안 열었는데 벌써 비슷한 일 겪었다."
"뭔데."
"상가 계약 보러 갔는데 어떤 사람이 그러더라."
"'장사 잘되면 돈 쉽게 벌겠다.'"
세 사람 모두 웃었다.
재민은 한숨을 쉬었다.
"그 사람은 내가 대출 얼마나 받는지도 모르고.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그냥 사장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고 결론을 내린 거지."
이야기가 여기까지 오자.
태윤이 문득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이상하다."
"뭐가."
"사람은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분류하려고 하는 것 같다."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젊은 사람."
"꼰대."
"선생."
"사장."
"공무원."
"백수."
태윤은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이름표를 붙이는 순간 상대를 이해한 것처럼 느끼잖아."
재민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근데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건데."
한참 동안 이야기가 이어졌다.
예전 같으면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달랐다.
누군가 질문을 던지면.
누군가는 자기 경험을 말했고.
누군가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답은 달라도 대화는 계속됐다.
연구회도 같이 나이를 먹고 있었다.
그러다가.
도윤이 문득 말했다.
"근데 이게 더 무서운 것 같더라."
"뭐가."
"사람을 미워하는 게 생각보다 너무 쉽다는 거."
재민은 고개를 들었다.
도윤은 진지했다.
"인터넷 댓글 몇 줄만 읽어도 누군가를 싫어할 수 있다. 기사 제목 하나만 봐도 욕할 수 있고."
잠시 침묵.
도윤은 말을 이었다.
"근데 좋아하려면 훨씬 오래 걸린다."
그 말에 세 사람 모두 생각에 잠겼다.
재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맞는 것 같다."
태윤도 고개를 끄덕였다.
"싫어하는 건 쉬운데 이해하는 건 어렵다."
도윤은 잔에 남은 맥주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가끔은 그래서 인터넷이 무섭다."
"왜."
"사람을 이해하는 시간을 없애 버리니까."
그날 연구회는 오랜만에 오래 이야기했다.
살인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범죄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도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생각했다.
살인이라는 것도.
어쩌면 아주 거창한 분노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계속 쌓이고.
계속 오해하고.
계속 미워하다가.
어느 순간 선을 넘어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 생각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