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셋은 만나지 못했다.
각자 사는 게 바빴다.
재민은 여자친구를 만나는 시간이 늘어났고, 가게 일도 전보다 진지하게 배우기 시작했다.
태윤은 임용 준비와 학교 일로 정신이 없었고, 도윤도 학교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재민이 단체방에 사진 하나를 올렸다.
푸른 바다가 찍힌 사진이었다.
재민 : 요즘 이상하게 답답한데 바다나 보러 갈래?
태윤 : 좋다. 나도 머리 좀 식히고 싶었는데.
도윤 : 나도 괜찮음.
재민 : 오케이. 그럼 이번 주말.
그렇게 셋은 강릉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는 별 이야기가 없었다.
예전 같으면 음악 틀어놓고 시끄럽게 떠들었을 텐데
이상하게 다들 조용했다.
나이를 먹은 건지, 아니면 각자 품고 있는 고민이 많아진 건지 알 수 없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바닷가에 앉았을 때도 한동안은 말이 없었다.
재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왜 답답하면 바다를 찾는지 알 것 같다.
사실 고민이 없어지는 건 아닌데 바다를 보고 있으면 내 문제가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집에 돌아가면 똑같이 고민하겠지만."
도윤이 웃었다.
"그건 인정한다. 나도 가끔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줄 알다가도 다른 사람들 이야기 들으면 별것도 아니더라."
태윤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신기한 건 바다를 봐도 결국 고민은 사람 때문에 생기고 사람 때문에 해결된다는 거다.
파도는 예쁜데 결국 집에 돌아가면 또 사람들 만나야 하잖아."
셋은 잠시 웃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재민의 시선이 어딘가에 고정됐다.
도윤은 그 표정을 보자마자 알았다.
"하지 마."
재민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십 년 넘게 봤다."
태윤도 따라 웃었다.
"분명 헌팅 생각했다."
재민은 포기한 듯 웃었다.
"근데 솔직히 말해서 저 정도면 한 번쯤 말 걸어보고 싶지 않냐.
어차피 여행 왔는데 모르는 사람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도 추억이지."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 생각이고."
결국 몇 번의 실패 끝에 마지막으로 말을 걸었던 여자 셋은 의외로 흔쾌히 합석을 받아들였다.
저녁이 되고 여섯 명은 횟집에 마주 앉았다.
처음에는 평범한 이야기였다.
어디서 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여행은 얼마나 자주 다니는지.
그런 이야기들이 오갔다.
재민은 간호사라는 여자와 이야기하고 있었고,
도윤은 출판사에서 일하는 여자와 책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며,
태윤은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는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분위기가 바뀐 건 연애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였다.
재민이 웃으며 물었다.
"근데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 왜 다들 남자친구가 없는 겁니까.
솔직히 세 분 다 충분히 인기 많을 것 같은데."
그러자 간호사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없어서 안 만나는 것도 있고, 무서워서 안 만나는 것도 있죠."
재민은 그 말이 의외였는지 눈을 깜빡였다.
"연애가 무섭다고요?"
"연애 자체가 무섭다기보다 사람이 무서울 때가 있어요.
제 친구가 데이트 폭력을 당한 적이 있는데 그때 처음 알았거든요.
뉴스에 나오는 일이 꼭 남의 일이 아니구나."
순간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어린이집 교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직접 당한 건 아닌데
친구가 몰래카메라 문제로 경찰서까지 갔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 이후로는 밤길도 조금 신경 쓰게 되고 사람 보는 기준도 달라지더라고요."
도윤은 조용히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생각해보면 자신들은 그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많지 않았다.
뉴스로는 봤다.
기사로는 읽었다.
하지만 눈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자기 친구 이야기라고 말하는 순간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태윤이 천천히 말했다.
"솔직히 저는 그런 부분은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남자 입장에서는 생각도 못 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거든요."
출판사 직원이 웃었다.
"저희도 반대예요. 남자들이 뭘 무서워하는지는 잘 모르죠."
재민이 바로 대답했다.
"저는 대출이 제일 무섭습니다."
순간 여섯 명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한 번 웃고 나니 분위기는 다시 편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화는 계속 사람 이야기로 흘러갔다.
범죄 이야기.
처벌 이야기.
뉴스 이야기.
누군가는 사형제에 찬성했고 누군가는 반대했다.
누군가는 피해자의 분노를 이해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복수는 결국 또 다른 상처를 만든다고 말했다.
신기하게도 누구 하나 정답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각자의 경험을 이야기할 뿐이었다.
그리고 도윤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연구회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는데, 정작 자신들과 비슷한 사람들에게만 질문을 던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날 밤은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누군가를 꼬셔보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술자리였지만 결국 가장 오래 남은 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새벽 세 시가 넘었을 무렵.
재민은 테이블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고,
도윤은 벽에 기대어 졸고 있었으며,
누군가는 웃다가 잠들었고
누군가는 술잔을 잡은 채 잠들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숙취에 시달리며 일어난 재민이 말했다.
"그래서 어제 누구랑 잘된 사람 있냐."
도윤은 머리를 감싸쥐며 말했다.
"어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기억 안 난다."
재민은 한숨을 쉬었다.
"이 정도면 헌팅하러 간 건지 MT 가서 쓰러진 건지 모르겠다."
그때 태윤이 조용히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새로운 메시지가 하나 도착해 있었다.
아직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