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민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다만 그렇게 진지하게 만나고 있다는 건 처음 들었다.
그날도 셋은 오랜만에 술집에 모여 있었다.
예전 같으면 게임 이야기나 연예인 이야기로 몇 시간을 떠들었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각자 보고 있는 세상이 달라졌고 고민도 달라졌다.
재민이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 아마 결혼은 빨리 할 것 같다."
도윤이 웃었다.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라 원래 나는 결혼 빨리 하고 싶었어."
태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다. 너 옛날부터 애 낳고 사는 이야기 좋아했잖아."
재민은 피식 웃었다.
"근데 나보다 여자친구가 더 적극적이다."
"왜?"
"자기는 서른 넘기고 싶지 않대. 애도 가능하면 일찍 낳고 싶고."
잠시 정적.
도윤이 물었다.
"그래서 너는?"
재민은 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결혼은 하고 싶은데 겁도 난다."
"뭐가 제일 겁나는데?"
태윤이 물었다.
재민은 잠시 생각했다.
"결혼 자체는 안 무섭다. 같이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근데 그 뒤가 무섭다."
"뒤?"
"집."
"아."
"대출."
"아."
"아이."
"아..."
셋 다 웃었다.
재민도 따라 웃었지만 표정은 마냥 밝지 않았다.
"예전에는 결혼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그게 시작이더라. 집도 있어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애가 생기면 교육도 시켜야 하고. 생각해 보니까 사랑보다 책임이 더 크더라."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인정."
"그래서 요즘 장사 배우는 것도 더 진지하게 보게 된다."
"가게 차리려고?"
"언젠가는."
재민은 웃었다.
"남 밑에서 평생 일하는 것도 싫고."
그때였다.
술집 입구 쪽이 시끄러워졌다.
누군가 큰 소리로 따지고 있었다.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중년 남성이 직원 한 명을 붙잡고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아니 내가 여기서 넘어졌잖아요."
직원은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손님, CCTV 확인해 보시면..."
"뭘 확인해요? 내가 넘어진 게 사실인데."
"손님이 급하게 뛰어오시다가..."
"그래서 내 잘못이라는 거예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주변 손님들도 슬슬 쳐다보기 시작했다.
남성은 계속 말했다.
"병원 가서 진단받으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책임지실 거예요? 내가 이 나이에 허리 다치면 누가 책임질 건데."
직원은 난감한 표정이었다.
잠시 뒤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나와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 장면을 지켜보던 재민이 혀를 찼다.
"장사 무섭네."
도윤이 웃었다.
"갑자기?"
"아니 진짜."
재민은 진심이었다.
"저 사람은 지금 자기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잖아."
태윤이 말했다.
"넘어졌으니까."
"근데 CCTV 보니까 본인이 뛰어오다가 넘어진 것 같던데."
"그래 보이긴 하더라."
재민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근데 신기한 건 저 사람도 집에 가면 자기가 억울했다고 이야기할 것 같다."
도윤이 웃으며 물었다.
"그건 왜."
"아니 생각해 봐."
재민은 말을 이었다.
"본인이 뛰다가 넘어진 건 기억 안 날 수도 있잖아. 자기는 넘어진 것만 기억하는 거지. 그러면 자기 입장에서는 억울한 피해자일 수도 있겠다 싶더라."
태윤이 말했다.
"그럼 이해해야 한다는 거냐."
"아니."
재민은 고개를 저었다.
"이해랑 별개로 신기하다는 거지."
잠시 정적.
재민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요즘 가게에서 일하면서 느끼는 건데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기 잘못을 잘 못 보는 것 같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도윤이 웃으며 말했다.
재민도 웃었다.
"그럴 수도 있지."
"아니 진짜로."
도윤은 말을 이었다.
"우리도 다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잖아."
"그건 맞다."
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어떤 사람들은 그 정도가 너무 심한 것 같아."
태윤이 물었다.
"예를 들면?"
"뉴스만 봐도 그렇잖아."
재민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사기 친 사람은 먹고 살려고 그랬다고 하고, 사람 때린 사람은 먼저 도발당했다고 하고, 바람피운 사람은 외로웠다고 하고. 다 자기 나름의 이유는 있어. 근데 가만히 듣고 있으면 피해자가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더라."
도윤과 태윤은 말없이 들었다.
재민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무슨 생각."
"사람은 원래 다 자기 편인 건가."
집으로 돌아온 뒤.
도윤은 연구회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천천히 적었다.
사람은 왜 자기 잘못보다 남의 잘못을 먼저 볼까.
잠시 생각하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사람은 정말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
도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예전에는 범죄자가 궁금했다.
그런데 요즘은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이 더 궁금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세상의 문제는 특별한 악인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이기심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