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민이 먼저 연락한 건 드문 일이었다.
태윤은 학원에서 나오던 길이었고, 도윤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가던 중이었다.
재민 「오늘 시간 되냐」
도윤 「무슨 일인데」
재민 「그냥 술 한잔하자」
태윤 「재민이가 먼저 보자고 하는 거면 일 있는 거네」
재민 「와서 들어」
짧은 대화였다.
하지만 셋 다 알았다.
재민이 저렇게 말할 때는 뭔가 있다는 걸.
술집에 도착했을 때 재민은 이미 소주 한 병을 비운 상태였다.
도윤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재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평소 같으면 만나자마자 이야기를 쏟아냈을 텐데 오늘은 달랐다.
태윤도 분위기를 읽은 듯 조용히 기다렸다.
재민은 잔을 채우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너희 진짜 솔직하게 대답해 봐."
도윤이 웃었다.
"뭔데."
재민은 잠시 망설였다.
"살면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어?"
순간 정적이 흘렀다.
도윤은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재민 표정은 진지했다.
태윤이 먼저 물었다.
"무슨 일 있었냐."
재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게에 어떤 손님이 있었거든."
"진상?"
도윤이 물었다.
"그 정도면 차라리 낫지."
재민은 씁쓸하게 웃었다.
"처음에는 환불해 달라고 왔어. 유통기한도 안 지난 제품이었고 멀쩡한 제품이었는데 자기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그래서 규정상 어렵다고 설명했지."
"그랬더니?"
태윤이 물었다.
"그다음부터 시작이더라."
재민은 소주를 한 모금 마셨다.
"본사에 전화하고, 구청에 민원 넣고, 인터넷 카페에 글 올리고, 리뷰 사이트에 별점 테러하고. 심지어는 내가 불친절했다고 없는 이야기까지 만들어서 퍼뜨렸어."
도윤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 그렇게까지 해?"
"나도 모르겠다."
재민은 허탈하게 웃었다.
"문제는 그 사람도 자기가 피해자라고 생각한다는 거야."
잠시 침묵.
재민은 말을 이었다.
"그게 제일 이해가 안 되더라."
"뭐가."
"나는 솔직히 아무 잘못도 안 했거든. 규정대로 설명했고 욕도 안 했고 목소리 높인 적도 없어. 그런데 그 사람 머릿속에서는 자기가 부당한 대우를 받은 피해자인 거야."
태윤은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사람들 있지."
"아니."
재민은 고개를 저었다.
"문제는 나도 요즘은 모르겠다는 거야."
도윤이 물었다.
"뭘."
재민은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그 사람이 원래 나쁜 사람인 건지, 아니면 자기 입장에서 진짜 억울한 건지."
"그건 다르지."
태윤이 말했다.
"억울한 거랑 남한테 피해 주는 건."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재민이 대답했다.
"근데 그 사람도 자기 친구들 만나면 이렇게 이야기할 거 아니냐."
재민은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돈 주고 샀는데 환불도 안 해주더라. 진짜 불친절하더라.'"
도윤과 태윤은 말이 없었다.
그 말은 이상하게 반박하기 어려웠다.
도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재민이 쳐다봤다.
"그 사람 입장이 이해된다고 해서 잘못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세상 모든 범죄자도 자기 입장에서는 이유가 있을 거야."
도윤은 잠시 생각했다.
"근데 이유가 있다고 다 정당화되지는 않잖아."
태윤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생각은 한다."
재민은 잔을 비웠다.
"근데 그 경계가 어디냐는 거지."
"무슨 말."
"사람들은 다 자기 입장에서 살아."
재민은 천천히 말했다.
"사기 치는 놈도 자기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고. 바람피운 놈도 외로웠다고 하고. 갑질하는 사람도 자기는 정당하다고 생각하더라."
잠시 정적.
"그럼 어디서부터 악인인 걸까."
셋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답을 내려고 했을 것이다.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는지.
누가 나쁘고 누가 착한지.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질문이 더 어려워졌다.
태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한다."
"뭔데."
"뉴스에 나오는 범죄자들 있잖아."
도윤과 재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특별한 인간들인 줄 알았어."
태윤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근데 요즘은 모르겠다."
"왜."
"그 사람들도 처음부터 범죄자는 아니었을 거 아니야."
재민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태윤은 잔을 내려놓았다.
"누군가는 작은 화에서 시작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억울함에서 시작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자기 행동이 정당하다고 믿었을 수도 있겠지."
잠시 정적.
"그렇다고 범죄를 이해하자는 말은 아니야."
"알아."
도윤이 말했다.
"근데."
태윤은 씁쓸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인간이라는 게 무섭다는 생각은 든다."
집으로 돌아온 뒤.
도윤은 오랜만에 연구회 노트를 펼쳤다.
오늘은 새로운 질문이 생긴 날이었다.
왜 사람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할까.
도윤은 그 문장을 적고 한참 동안 바라봤다.
재민의 손님도.
뉴스 속 범죄자도.
어쩌면 자기 나름의 이유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어디까지 용납될 수 있는 걸까.
도윤은 노트를 덮었다.
이번 질문은 이상하게 불편했다.
그래서 더 오래 생각하게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