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 시였다.
임해원은 자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려고 하고 있었다.
현장 일을 오래 한 사람들은 안다.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쉽게 잠들지 않는 날이 있다는 걸.
그날도 그랬다.
눈은 감고 있었지만 완전히 잠든 상태는 아니었다.
그때.
휴대폰 진동이 짧게 울렸다.
부르르.
해원은 베개 옆에 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화면을 확인했다.
예나였다.
입가에 작은 웃음이 번졌다.
언제부터인가 예나 이름만 떠도 기분이 좋아졌다.
메시지를 눌렀다.
[오빠]
해원은 짧게 답했다.
[응]
몇 초 뒤.
답장이 도착했다.
[딸기 먹고 싶다]
해원은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장난이었다.
누가 봐도 장난이었다.
새벽 두 시에 갑자기 딸기.
예나답다면 예나다운 문자였다.
해원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잠시 뒤.
다시 눈을 떴다.
천장을 바라봤다.
십 초 정도.
결국 한숨 섞인 웃음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
괜히 웃음이 났다.
"진짜."
새벽 거리는 조용했다.
차도 많지 않았다.
해원은 운전대를 잡고 혼자 웃고 있었다.
딸기 먹고 싶다는 문자 하나 때문에.
지금 자신이 뭘 하고 있는 건지 생각하면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첫 번째 편의점.
없었다.
두 번째 편의점.
없었다.
세 번째 편의점.
역시 없었다.
해원은 냉장 진열장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왜 하필 딸기야."
그러면서도 차에 다시 올라탔다.
포기할 생각은 이상하게 들지 않았다.
예나가 정말 먹고 싶어서 보낸 건 아닐 것이다.
심심해서.
장난치고 싶어서.
그냥 문득 생각나서.
그 정도겠지.
그런데도.
찾아주고 싶었다.
결국 24시간 마트를 찾았다.
과일 코너를 둘러보던 해원의 눈이 반짝였다.
딸기였다.
그것도 꽤 괜찮아 보이는 딸기.
해원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마치 보물을 찾은 사람처럼.
딸기 두 팩을 집었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멈췄다.
예나가 전에 맛있다고 했던 과자도 집었다.
맥주도 두 캔 담았다.
이왕 가는 거 빈손으로 갈 필요는 없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서른다섯살 먹은 남자가.
새벽 세 시에.
딸기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
누가 들으면 웃을 이야기였다.
그런데.
해원은 계속 웃고 있었다.
차를 세운 뒤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가 울리고.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잠결이었다.
완전히.
해원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나와."
잠시 정적.
"응?"
"밖에."
"오빠?"
"응."
다시 정적.
그리고.
"설마."
해원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몇 분 뒤.
복도 끝 문이 열렸다.
그리고 예나가 걸어 나왔다.
해원은 그 모습을 본 순간 그대로 웃음을 터뜨렸다.
예나는 평소 모습과 너무 달랐다.
머리는 대충 위로 묶여 있었고.
잠옷 차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커다란 동그란 안경.
얼굴 절반은 가릴 것 같은 왕안경이었다.
하얀 얼굴에.
동그란 안경.
잠이 덜 깬 표정까지 더해지니 정말 뽀로로 같았다.
예나는 해원이 웃는 걸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 보자마자 왜 웃어."
해원은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니, 그냥."
"그냥은 무슨 그냥이야."
예나는 괜히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그제야 자신이 안경을 쓴 채 나왔다는 걸 떠올린 모양이었다.
"아."
짧게 탄성이 나왔다.
해원은 결국 또 웃었다.
"예나야."
"왜."
"진짜 뽀로로 같다."
예나는 얼굴을 감쌌다.
"오빠."
"응."
"그 말 듣고 좋아할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
"예나는 좋아할 것 같은데."
"안 좋아하거든."
그렇게 말하면서도 입꼬리는 이미 올라가 있었다.
예나가 가까이 다가오자 해원은 자연스럽게 팔을 벌렸다.
예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는 듯 걸어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대로 품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오빠."
예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진짜."
해원은 대답 대신 조금 더 꼭 안았다.
"숨 막혀."
"조금만."
"그 말 맨날 해."
"오늘은 진짜 조금만."
예나는 웃으며 해원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그러니까 숨 막힌다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떨어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고개를 더 파묻었다.
해원은 문득 생각했다.
아.
보고 싶었구나.
생각보다 훨씬.
한참 뒤.
예나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안을 확인했다.
딸기.
과자.
맥주.
예나 눈이 동그래졌다.
"진짜 사 왔네."
"먹고 싶다며."
"장난이었는데."
"알아."
"근데 왜 사 와."
해원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먹고 싶다니까."
예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작게 웃었다.
"오빠."
"응."
"꽤 센스 있는데."
"그치."
"인정."
예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엘리베이터도 조용했다.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간.
세상에 둘만 남은 것 같은 시간이었다.
예나는 딸기 봉투를 내려놓고 해원을 바라봤다.
"진짜 올 줄 몰랐어."
해원은 웃었다.
"나도."
"응?"
"진짜 올 줄 몰랐는데."
예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짧게.
해원은 가만히 예나를 바라봤다.
"끝이야?"
예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새벽 세 시에 딸기 배달까지 왔는데."
"그래서."
"너무 짠데."
예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욕심쟁이."
그러더니 장난스럽게 두 손으로 해원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리고.
쪽.
쪽.
쪽.
쪽.
연달아 네 번.
박력 있게.
해원은 그대로 웃음을 터뜨렸다.
예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 정도면 됐어?"
해원은 씨익 웃었다.
"충전 완료."
예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그게 뭐야."
"몰라."
"이상해."
"그래도 충전 완료."
그날 이후.
충전 완료는 둘만 아는 말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해원은 창문을 조금 열었다.
새벽 바람이 들어왔다.
분명 피곤했다.
잠도 부족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은 가벼웠다.
입가에는 웃음이 남아 있었다.
안경 쓴 예나.
숨 막힌다고 투덜거리던 예나.
그리고 방금 전.
장난스럽게 얼굴을 붙잡고 해줬던 뽀뽀.
그 감촉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일기
새벽 세 시에 딸기를 사러 다녀왔다.
객관적으로 보면 정상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즐거웠다.
누군가가 먹고 싶다고 한 딸기를 사러 가는 일.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잠을 포기하는 일.
누군가의 웃는 얼굴을 보고 돌아오는 일.
생각해 보니 사랑이라는 건 원래 조금 비효율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다.
이런 새벽 방문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다.
오늘은 충전이 아주 잘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