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해원은 씻고 나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있었다.
하루 종일 현장을 뛰고 들어온 날이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이상하게 잠은 오지 않았다.
TV에서는 별 의미 없는 예능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해원은 소파에 기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때 진동이 짧게 울렸다.
예나.
해원은 자연스럽게 화면을 눌렀다.
오빠.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은 두 글자였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가슴이 철렁했다.
해원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고 예나가 전화를 받았다.
"예나야."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숨소리만 들렸다.
해원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울고 있다.
"어디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예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겨우 입을 열었다.
"집 앞."
"집 안이야?"
"아니."
목소리가 떨렸다.
"계단."
해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기 있어."
"오빠."
"응."
"미안."
해원은 신발을 신으며 작게 웃었다.
"울고 있는 사람이 왜 미안하대."
예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있어."
"응."
"금방 갈게."
전화를 끊고 집을 나섰다.
예나는 오피스텔 비상계단 중간쯤에 앉아 있었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해원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예나는 발소리를 듣고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해원은 말없이 옆에 앉았다.
"왔어."
그 말 한마디에 예나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참고 있던 울음이 다시 터졌다.
해원은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예나 손에 쥐여주었다.
예나는 휴지를 받았지만 눈물을 닦지 못했다.
그냥 울었다.
해원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왜 우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묻지 않았다.
지금은 이야기를 듣는 시간보다 울음을 다 쏟아내는 시간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형광등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현관문을 닫는 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예나의 울음.
해원은 천천히 어깨를 내어주었다.
예나는 망설이지 않고 기대왔다.
그렇게 한참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예나는 울었고.
해원은 가만히 곁에 있었다.
한참 뒤.
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걷고 싶어."
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공원까지는 천천히 걸었다.
밤공기는 생각보다 선선했다.
낮에는 아직 여름 같았는데 밤이 되니 가을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지르르르.
지르르르.
풀숲 어딘가에서 벌레들이 울고 있었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예나는 두 손을 모은 채 한참 동안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나 사실."
목소리가 많이 잠겨 있었다.
"오빠한테 한 번도 안 한 얘기 있어."
해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나는 한참 동안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무언가를 꺼내려는데 쉽지 않은 사람처럼.
"계속 안 하려고 했는데."
예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오늘은 해야 될 것 같아."
바람이 지나갔다.
예나는 멀리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집 원래는 이 정도는 아니었어."
"응."
"엄청 잘 산 건 아닌데 그래도 괜찮았어."
해원은 듣고만 있었다.
"근데 집이 망했어."
예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더 아팠다.
"아빠 사업이 망했고."
"부모님은 결국 이혼했고."
"집에는 돈이 없었고."
예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처음에는 그게 제일 힘든 줄 알았어."
"돈 없는 거."
"집안 망한 거."
"엄마 아빠 이혼한 거."
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근데 아니더라."
한참 침묵이 흘렀다.
밤벌레 소리만 들렸다.
예나는 어렵게 말을 이어갔다.
"나 사실 성추행 당했어."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예나를 바라보았다.
예나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한 번이 아니었어."
"꽤 오래."
"한 2년 정도."
예나는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꽉 쥐었다.
"처음에는 내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도 몰랐어."
"어렸으니까."
"그냥 불편했고."
"그냥 싫었고."
"근데 왜 싫은 건지는 몰랐어."
예나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
"나중에 크고 나서야 알았어."
"아."
"그게 성추행이었구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예나는 괜히 먼저 설명했다.
"관계까지 간 건 아니야."
"내가 워낙 어렸고."
"성장도 늦었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었어."
"근데 계속 둘만 있게 만들었고."
"계속 만졌고."
"계속 그런 식이었어."
"오랫동안."
해원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예나는 그걸 보지 못했다.
"더 힘들었던 건."
예나는 고개를 숙였다.
"엄마가 알고 있었다는 거야."
이번에는 해원도 표정이 굳어졌다.
예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이 다시 흘렀다.
"나는 오랫동안 엄마가 몰랐다고 생각했어."
"그래야 내가 덜 힘들 것 같았거든."
"엄마는 몰랐을 거라고."
"엄마도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계속 그렇게 생각했어."
예나는 눈물을 닦았다.
"근데 아니었어."
"엄마는 알고 있었어."
"다 알고 있었어."
예나는 웃었다.
울면서 웃는 얼굴이었다.
"그냥 모르는 척한 거야."
"돈 때문에."
"집이 너무 힘들었으니까."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그래서 그냥."
목소리가 무너졌다.
"모르는 척한 거야."
예나는 얼굴을 감쌌다.
"그래서 아직도 모르겠어."
"엄마를 이해해야 되는 건지."
"원망해야 되는 건지."
"둘 다 해야 되는 건지."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 위로도 가볍게 들릴 것 같았다.
예나는 한참 울다가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사람을 잘 못 믿어."
"누가 잘해주면 좋아."
"근데 너무 좋아지면 무서워."
"기대고 싶어지면 더 무서워."
"의지하게 되면 더 무서워."
예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예전에 좋아했던 사람도 있었어."
"좋은 사람이었어."
"진짜로."
"내가 힘들어하면 자기 일처럼 걱정했고."
"계속 도와주려고 했고."
"계속 내 편이 되어주려고 했어."
해원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근데 어느 순간."
"그게 무서워졌어."
"내가 짐이 되는 것 같았거든."
"내 인생 하나도 감당 못 하는데."
"그 사람 인생까지 힘들게 만드는 것 같아서."
예나는 시선을 떨구었다.
"그래서 조금씩 피했어."
"전화도 안 받고."
"만나자는 것도 미루고."
"연락도 늦게 하고."
"그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미안해서."
예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결국 헤어졌어."
"그리고 엄청 후회했어."
"근데 그때는 진짜 그게 최선인 줄 알았어."
해원은 처음으로 예나가 왜 그렇게 관계를 정의하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예나는 계속 말했다.
"그래서 오빠가 무서웠어."
"좋아서."
"내가 또 그러면 어떡하지."
"내가 또 도망가면 어떡하지."
"오빠한테 상처 주면 어떡하지."
"그래서 계속."
"계속 망설였어."
"좋아하는데."
"좋아할수록 무서웠어."
밤공기가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해원은 벤치 끝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화가 난다."
예나는 고개를 들었다.
해원은 잠시 말이 없었다.
무언가를 정리하는 사람처럼.
"예나가 겪은 일도 화나."
"근데 나는."
해원은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예나를 지켜줘야 했던 사람들이."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는 게."
"그게 더 화난다."
예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해원은 고개를 숙였다.
눈가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예나 잘못 아닌데."
"왜 예나가 혼자 견뎌."
"왜 예나가 미안해해."
"왜 예나가 아직도 그걸 끌어안고 살아."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해원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내가 예나 인생의 모든 아픔을 다 막아줄 수는 없어."
"그건 거짓말이니까."
예나는 조용히 해원을 바라봤다.
"근데."
해원은 예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적어도."
"나를 만나는 동안에는."
"누구도 예나한테 아무도 내 편이 없다는 생각은 못 하게 할게."
예나의 눈이 흔들렸다.
"예나가 원하면 언제든 갈 거야."
"새벽이든."
"어디든."
"전화하면 갈 거고."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예나 편 할 거야."
해원은 잠시 말을 멈췄다.
목이 메는 듯했다.
"그리고."
"예나 혼자 버티게 두지는 않을게."
해원의 눈가가 조금 젖어 있었다.
울지는 않았다.
하지만 울컥한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 말의 진심이.
그 마음이.
예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예나는 결국 다시 울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울음이었다.
시간은 어느새 12시 25분.
예나는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오빠."
"응."
"열두 시 넘었네."
"그러네."
예나는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오늘이 이일째네."
해원은 피식 웃었다.
"뭐가."
"우리."
해원은 잠시 웃었다.
예나는 해원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사실 어제."
"오빠가 조금 망설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부담스러울 수도 있고."
"복잡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래도 나는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했어."
예나는 조용히 웃었다.
"근데 오빠는 안 그랬잖아."
한참 침묵이 흘렀다.
"살면서 좋은 사람 안 만나본 건 아니야."
"내 편 들어준 사람도 있었고."
"걱정해 준 사람도 있었고."
"도와주려고 했던 사람도 있었어."
예나는 천천히 말했다.
"근데."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내 편이 되어준 사람은 처음인 것 같아."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나는 눈을 감은 채 웃었다.
"어제부터 사귀는 거야."
"어제가 일일."
"오늘이 이일째."
해원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천천히 웃었다.
"알겠다."
"뭐가."
"오늘이 이일째라는 거."
예나는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은 오랜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상처보다 조금 더 행복이 많은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