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는 그날 밤 잠을 쉽게 이루지 못했다.
집 앞 골목에서 해원과 헤어진 뒤 방으로 돌아왔을 때만 해도 괜찮았다.
신발을 벗고, 가방을 내려놓고, 손을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는 동안까지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 불을 끄고 나자 이상하게 마음이 조용해지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어떤 관계인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해원이 했던 말이 계속 떠올랐다.
그 말이 불편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해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아니, 어쩌면 너무 당연한 말이었다.
손을 잡고, 바래다주고, 매일 연락하고, 주말이면 만나고, 서로의 하루를 궁금해하면서도 아무 이름 없이 지낸다는 건 생각보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 말만큼은 분명했다.
해원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부담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해원과 있으면 마음이 놓였다. 해원이 웃으면 자기도 웃게 되었고, 해원이 조용히 자기 손을 잡고 걸으면 이상하게 아무 걱정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해원이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면 조금 더 붙잡고 싶었다.
그런데도 사귀자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예나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오랫동안 들어가던 커뮤니티였다.
처음에는 심심해서 봤고, 나중에는 습관처럼 봤고, 서울에 올라온 뒤에는 거의 친구처럼 봤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가끔은 얼굴을 아는 사람보다 더 편했다.
누군가 자신을 판단하더라도 어차피 닉네임 뒤에 숨어 있는 사람들이었고, 예나 역시 닉네임 뒤에 숨어 있을 수 있었으니까.
예나는 한참 동안 빈 글쓰기 창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제목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연애가 무서운 게 이상한 걸까요.
내용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보다 나이도 많고, 성격도 좋고, 저를 많이 배려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과 있으면 마음이 편합니다.
대단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좋고, 그냥 같이 밥을 먹고 걷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괜찮아집니다.
저를 가볍게 대하는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너무 조심스러울 정도로 저를 아껴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 관계에 대해 물었을 때 저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좋아합니다.
문제는 제가 아직 제 삶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취업도 확실하지 않고, 돈도 넉넉하지 않고, 미래도 불안합니다.
지금도 하루하루 버티는 기분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만나면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더 무섭습니다.
좋아서 자꾸 기대게 될 것 같고,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그 사람에게 쓰게 될 것 같고, 그러다 보면 제가 해야 할 것들을 또 미루게 될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제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제 생활이 흔들릴까 봐 겁이 납니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게 왜 이렇게 무서울까요.
제가 이상한 걸까요.
예나는 글을 올리고 나서도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댓글은 금방 달리기 시작했다.
좋아하면 만나라는 사람도 있었고, 지금 그렇게 불안하면 조금 더 시간을 두라는 사람도 있었다.
상대방 입장도 생각해 줘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좋은 사람일수록 애매하게 붙잡아두면 안 된다는 사람도 있었다.
틀린 말은 없었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
예나는 댓글을 읽다가 어느 한 문장에서 멈췄다.
좋아하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잃는 게 무서운 것 같네요. 시작하면 언젠가 끝날 수도 있으니까요.
예나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해원과 시작하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라, 해원과 시작한 뒤 잃게 될 것들이 무서운 것인지도 몰랐다.
해원을 잃는 것도, 지금의 평온함을 잃는 것도, 해원을 좋아하는 자신을 잃는 것도.
예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바라봤다.
방 안은 조용했다.
그런데 마음은 이상하게 시끄러웠다.
다음 날 해원은 현장에서 재헌을 만났다.
재헌은 다른 팀 일정 때문에 잠깐 들른 길이었다. 해원은 멀리서 재헌을 보고 먼저 인사했다.
"재헌 씨, 오셨습니까."
"네, 해원 씨. 오늘 여기 계셨네요."
재헌은 커피를 하나 받아 들고 해원을 잠시 바라봤다. 그 시선이 이상하게 길었다.
해원은 괜히 커피를 마셨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재헌은 웃었다.
"요즘 좋은 일 있죠."
"없습니다."
"있네요."
"없습니다."
"해원 씨는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게 이런 건 얼굴에 다 나옵니다."
해원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도대체 다들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그래요?"
"네. 요즘 제 주변 사람들이 다 이상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이상한 게 아니라 해원 씨가 좀 달라진 거 아닐까요."
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재헌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해원 씨 팀원들도 그러던데요. 우리 팀장님 요즘 뭔가 있다, 여자 생긴 것 같다, 회식도 안 하고 맨날 어디 간다. 대충 그런 이야기요."
"그 친구들이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 친구들이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는 건 맞는데, 없는 말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해원은 결국 웃었다.
"아직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거라는 게 뭡니까."
"그냥, 재헌 씨가 생각하는 그런 거요."
"제가 뭘 생각했는데요."
"아니, 뭐."
해원은 말을 흐렸다.
재헌은 그런 해원을 보며 더 웃었다.
"해원 씨."
"네."
"좋은 사람입니까?"
해원은 그 질문에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농담으로 넘길 수도 있었고, 아직 모른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 앞에서는 가벼운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한참 뒤 해원이 조용히 말했다.
"좋은 사람입니다."
재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해 봐요."
"잘하고 싶은데 그게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해원 씨가 어려워하는 걸 보니까 진짜 좋은 사람인가 보네요."
해원은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보통 아무렇게나 만나도 되는 사람한테는 그렇게 고민 안 하니까요.
사람은 정말 놓치기 싫은 사람 앞에서 오히려 더 조심스러워집니다.
실수 하나가 오래 남을까 봐 겁나고, 말 하나를 해도 괜히 다시 생각하게 되고."
해원은 아무 말 없이 재헌의 말을 들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잠시 뒤 재헌은 커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좋은 사람 같으면 놓치지 마요. 다만 너무 급하게 잡으려고도 하지 말고요."
"어렵네요."
"원래 그런 게 제일 어렵습니다."
재헌은 가볍게 웃었다.
"일은 정리하면 되지만 사람 마음은 정리한다고 정리되는 게 아니니까요."
해원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현장에서는 늘 답을 찾는 사람이었다.
자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차량이 몇 시에 들어와야 하는지, 인원이 어디에 붙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은 정리하면 됐다.
하지만 예나의 마음은 그럴 수 없었다.
알고 싶었다.
그런데 물어볼 수 없었다.
도와주고 싶었다.
그런데 무엇을 도와야 할지 몰랐다.
그날 저녁, 해원은 예나를 만났다.
둘은 특별한 곳에 가지 않았다.
자주 가던 국밥집에서 저녁을 먹고, 근처 카페에서 따뜻한 음료를 마신 뒤 동네를 조금 걸었다.
대단한 일은 없었다.
서로의 하루를 이야기했고, 별것 아닌 농담을 했고, 중간중간 웃었다.
예나는 그런 시간이 좋았다.
이상하게도 특별한 데이트보다 이런 시간이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해원이 숟가락을 놓으며 자기 그릇에 깍두기를 덜어주는 것도, 카페에서 뜨거운 컵을 잡기 전에 조심하라고 말해주는 것도, 걸을 때 자연스럽게 차도 쪽으로 서는 것도.
해원은 그런 행동들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게 더 좋았다.
카페에서 나와 걷던 중 예나가 문득 물었다.
"오빠는 왜 그렇게까지 조심해요?"
해원은 잠시 예나를 바라봤다.
"내가?"
"응. 오빠는 뭐든지 조심하는 것 같아서. 말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나한테 뭘 물어볼 때도 항상 한 번 더 생각하는 것 같고."
해원은 조금 웃었다.
"불편해?"
"아니. 불편한 건 아닌데, 가끔은 궁금해요. 오빠가 원래 그런 사람인지, 아니면 나한테만 더 그런 건지."
해원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둘은 천천히 걸었다.
겨울도 아니고 여름도 아닌 애매한 날씨였다. 바람은 조금 차가웠고, 가로등 불빛은 골목 위에 길게 내려앉아 있었다.
해원이 한참 뒤 말했다.
"원래도 조심하는 편이긴 한데, 예나한테는 더 그런 것 같아."
"왜요?"
"좋으니까."
예나는 걸음을 조금 늦췄다.
해원은 말하고 나서 괜히 멋쩍은 듯 웃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조금 더 조심하게 되는 것 같아.
안 좋아하는 사람한테 실수하면 미안하면 되는데, 좋아하는 사람한테 실수하면 그게 오래 남을까 봐 겁나니까."
예나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해원은 이어 말했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너무 조심스러운가 싶기도 해. 그런데 그걸 안 하기가 어렵더라."
예나는 손을 살짝 뻗어 해원의 손을 잡았다.
해원은 잠깐 멈칫했지만 곧 손을 맞잡았다.
예나는 그 손을 보며 말했다.
"나는 그게 싫진 않아."
해원은 예나를 바라봤다.
"그래?"
"응. 오빠가 조심해 주는 게 싫지는 않아. 그냥 가끔은 오빠가 너무 혼자 생각하는 것 같아서.
나도 생각이 많긴 한데, 오빠도 생각보다 훨씬 생각이 많은 사람 같아."
해원은 웃었다.
"생각이 많아서 좋은 건 별로 없는 것 같아."
"왜요."
"답이 없는 문제도 계속 생각하게 되니까."
예나는 그 말에 작게 웃었다.
그 말이 꼭 자기 이야기 같기도 했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예나는 해원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날 밤, 해원은 집에 돌아와 노트를 펼쳤다.
일기
오늘 재헌 씨를 만났다.
좋은 사람 같으면 놓치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하루 종일 생각했다.
예나는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좋은 사람이라서 더 어렵다.
함부로 가까워지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멀리 있고 싶지도 않다.
오늘 예나가 왜 그렇게까지 조심하냐고 물었다.
나는 좋으니까 그렇다고 말했다.
말하고 나서 조금 민망했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이상하게 겁이 많아진다.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을까 봐.
내가 너무 앞서갔을까 봐.
내가 너무 늦었을까 봐.
그러면서도 자꾸 확인받고 싶어진다.
예나는 나를 싫어하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데도 망설인다.
처음에는 내가 부족해서 그런 줄 알았다.
지금도 그런 생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쩌면 예나의 망설임은 나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예나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모른다.
알고 싶다.
그런데 지금은 묻는 것보다 기다리는 게 맞는 것 같다.
기다리는 것도 사랑일까.
오늘은 그런 생각을 했다.
해원은 펜을 내려놓았다.
한참 동안 노트를 바라보다가 다시 마지막 장을 펼쳤다.
이번에는 일기가 아니었다.
시였다.
시
안부
오늘도 밥은 먹었냐고 물었다
사실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혼자 있는 밤은 괜찮은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하루는 없었는지
울고 싶은데 웃은 적은 없는지
묻고 싶은 말들은
늘 안부보다 길었다
그래서 나는
가장 짧은 말 안에
가장 긴 마음을 숨긴다
밥은 먹었는지
집에는 잘 들어갔는지
춥지는 않은지
사람은 가끔
사랑한다는 말 대신
그런 것들을 묻는다
너는 아마 모를 것이다
내가 오늘도
네가 먹은 저녁보다
네가 무사히 지나온 하루를
더 궁금해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