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엎드렸다.
가방도 제대로 내려놓지 않았고, 겉옷도 벗지 않았다.
신발만 간신히 벗고 들어와 그대로 침대 위에 얼굴을 묻었다.
베개에서는 어제와는 전혀 다른 냄새가 났다.
익숙한 세제 냄새. 익숙한 방 냄새. 익숙한 자기 냄새.
그런데 이상하게 낯설었다.
어젯밤에는 다른 냄새가 있었다.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 냄새.
모텔 방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섬유유연제 냄새.
그리고 해원의 살갗에 아주 옅게 남아 있던 비누 냄새.
예나는 베개에 얼굴을 더 묻었다.
"아..."
짧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정말 그 정도였다.
문을 닫고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은 척했다.
아니, 괜찮은 척을 할 상대도 없었다. 해원은 방 안에 있었고, 자신은 혼자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다.
그런데도 얼굴은 계속 뜨거웠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이 너무 빨개서 예나는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가 어제 무슨 말을 했지.
오늘 같이 있을래요.
그 말을 내가 했지.
내가 먼저 했지.
예나는 이불을 움켜쥐었다.
물론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싫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는 그 반대였다. 좋았다. 너무 좋아서 문제였다.
해원은 끝까지 조심스러웠다.
그게 더 부끄러웠다.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가볍게 굴었으면, 조금이라도 능숙한 척을 했으면, 어쩌면 예나는 덜 흔들렸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해원은 어제도 계속 자신을 확인했다.
괜찮은지, 불편하지 않은지, 무섭지는 않은지.
입을 맞추기 전에도 그랬고, 안아줄 때도 그랬고, 잠들기 전에도 그랬다.
예나는 그런 사람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다정한 남자는 있었다.
친절한 남자도 있었다.
하지만 해원은 조금 달랐다.
다정한 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조심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상처 줄까 봐 겁내는 사람.
좋아하는 마음이 앞서도 상대의 속도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
그래서 더 무서웠다.
좋은 사람이라는 건 때때로 마음을 더 어렵게 만든다.
가볍게 만날 수 없는 사람이니까.
예나는 침대에 누운 채 휴대폰을 켰다.
해원의 대화창이 위에 있었다.
어젯밤 마지막 메시지.
편의점에서 맥주 살까요?
그 아래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 아침 이후로 자신이 먼저 나온 탓이었다.
밥이라도 먹고 가라는 해원의 말을 듣지 않고 그냥 나왔다.
해원이 무슨 표정이었는지 생각하면 또 얼굴이 뜨거워졌다.
당황한 얼굴. 걱정하는 얼굴.
혹시 자신이 뭘 잘못했나 싶어하는 얼굴.
예나는 휴대폰을 붙잡고 한참 고민했다.
뭐라고 보내야 하지.
잘 들어왔어요?
아니, 내가 나온 건데 잘 들어왔다는 말도 이상했다.
오빠 괜찮아요?
그건 더 이상했다.
괜찮아야 할 사람은 자기 쪽 같았다.
어제는 고마웠어요?
아니.
그건 너무 이상했다.
어제 좋았어요?
예나는 휴대폰을 얼굴에 던질 뻔했다.
"미쳤나 봐."
혼잣말이 나왔다.
결국 예나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잠깐만 있다가 연락하자.
조금만 진정하고.
정신 좀 차리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흘렀다.
정오가 지나고, 오후가 됐다.
배가 고팠지만 뭘 먹고 싶은지도 몰랐다.
냉장고를 열었다가 닫고, 컵라면을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어제부터 제대로 먹은 게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배고픔보다 부끄러움이 더 컸다.
예나는 결국 물만 한 컵 마셨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휴대폰을 켰다.
해원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었다.
그게 이상하게 서운했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자신이 먼저 나왔다.
밥도 안 먹고 도망치듯 나왔다.
해원 입장에서는 당황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쯤 자신을 부담스러워하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어제는 먼저 같이 있자고 해놓고, 아침에는 먼저 도망친 여자.
예나는 이불 속으로 얼굴을 숨겼다.
"진짜 최악이다."
그런데도 마음 한쪽에서는 자꾸 다른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 이제 무슨 사이인 거지.
어제 그렇게 됐으면 사귀는 건가.
아니, 사귀자는 말은 안 했잖아.
그런데 안 사귀는 사이에 그런 걸 하나.
요즘은 그런 사람들도 있긴 하지.
근데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잖아.
예나는 머리가 아팠다.
사실 답은 알고 있었다.
사귀는 게 맞았다.
해원을 좋아했다.
많이 좋아했다.
어제는 충동만으로 한 일이 아니었다. 몇 달 동안 해원을 봤다.
술을 마셔도 선을 넘지 않는 사람.
집까지 데려다주고도 돌아서는 사람.
손을 잡고 싶어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끝까지 기다리는 사람.
자신이 웃으면 따라 웃고, 조금만 조용해져도 금방 알아차리는 사람.
그 사람을 믿었다.
그래서 같이 있고 싶었다.
그러면 사귀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말이 쉬운 만큼 마음은 쉽지 않았다.
사귄다는 말이 붙으면 달라질 것들이 보였다.
지금도 해원 생각이 이렇게 많이 나는데, 사귀기 시작하면 더할 것이다.
쉬는 날마다 보고 싶을 것이고, 알바 끝나면 만나고 싶을 것이고, 공부해야 하는 시간에도 연락을 기다릴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되고 있었다.
취업 사이트를 켜 놓고도 해원 메시지를 먼저 확인했고,
자기소개서를 고치다가도 해원이 오늘 무슨 일을 했을까 생각했다.
달콤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예나는 서울에 취업하러 올라온 사람이었다.
친구들과 놀려고 올라온 것도 아니고, 연애를 하려고 올라온 것도 아니었다.
월세는 매달 나갔고, 학자금 대출도 남아 있었고, 엄마는 전화할 때마다 밥은 먹었는지 물었다.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괜찮은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은 취업 걱정보다 해원과 언제 볼지가 더 먼저 떠올랐다.
그게 무서웠다.
해원이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좋은 사람이라서였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사람은 자신의 생활을 조금씩 내어준다.
처음에는 저녁 한 번.
그 다음에는 쉬는 날 하나.
그 다음에는 마음 한쪽.
그러다 정신을 차려 보면 하루가 거의 그 사람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예나는 자신이 그렇게 될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이미 조금은 그렇게 되고 있었다.
오후 늦게까지 예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메시지를 쓰고 지웠다.
오빠.
여기까지 썼다가 지웠다.
해원 오빠.
이것도 지웠다.
잘 들어갔어요?
너무 평범했다.
어제 일은...
거기까지 쓰고 바로 지웠다.
도저히 안 됐다.
결국 예나는 커뮤니티를 열었다.
습관이었다.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생각이 생기면 예나는 먼저 사람들 글을 읽었다.
직접 글을 올릴 때도 있었고, 비슷한 고민을 검색할 때도 있었다.
친구에게는 차마 못 하는 말도 익명 게시판에는 이상하게 가능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가끔 무책임했지만, 가끔은 숨 쉴 틈이 되기도 했다.
검색창에 몇 번이나 단어를 넣었다 지웠다.
좋아하는 사람 첫날밤.
사귀기 전 잠자리.
관계 후 연락.
예나는 마지막 검색어를 보고 또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 진짜..."
그래도 결국 검색했다.
글은 많았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비슷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사귀기 전에 같이 밤을 보낸 뒤 남자가 연락이 뜸해졌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오히려 그날 이후로 바로 사귀게 됐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쉽게 보였을까 봐 걱정했고, 어떤 사람은 성인이면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별일 아니라는 댓글을 달았다.
예나는 천천히 읽었다.
자신이 듣고 싶은 답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건지.
조심하라는 말을 듣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냥 자신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은 건지.
댓글들은 대체로 제각각이었다.
서로 좋아하면 상관없다는 사람도 있었고, 그래도 관계를 확실히 하는 게 좋다는 사람도 있었다.
먼저 연락해 보라는 사람도 있었고, 남자가 먼저 연락하는지 보라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댓글은 차가웠고, 어떤 댓글은 다정했다.
예나는 한참 읽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결국 아무도 자신을 대신해 줄 수 없었다.
해원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건 자신뿐이었다.
어제 자신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도 자신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
저녁이 되자 방 안이 조금 어두워졌다.
예나는 불을 켜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
배가 고팠다.
그제야 조금 배가 고팠다.
하지만 일어나기가 싫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해원이었다.
예나는 휴대폰을 바로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메시지 하나였다.
잘 들어갔어요?
짧은 문장.
존댓말.
평소처럼 다정하고, 평소처럼 조심스러운 문장.
예나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갑자기 울 것 같았다.
왜 존댓말이지.
아니, 원래 존댓말이었잖아.
그런데 어제는.
어제는 분명 조금 달랐잖아.
예나는 손끝으로 화면을 만지작거렸다.
해원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왜 그렇게 갔냐고 묻지 않았다.
괜찮냐고 캐묻지도 않았다.
그저 잘 들어갔냐고 했다.
그게 해원다웠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예나는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네. 잘 들어왔어요.
보내려다가 멈췄다.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미안해요. 아침에 너무 갑자기 나와서.
이것도 썼다가 지웠다.
너무 무거웠다.
결국 예나는 한참 뒤에야 답장을 보냈다.
네. 잘 들어왔어요. 오빠도 괜찮아요?
보내고 나자 심장이 더 빨리 뛰었다.
잠시 뒤 답장이 왔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예나는 작게 웃었다.
또 괜찮다고 한다.
진짜 괜찮은 건지, 괜찮은 척하는 건지 모를 사람.
잠시 뒤 해원이 다시 보냈다.
아침에는 조금 걱정했습니다.
예나는 그 문장을 보고 눈을 감았다.
미안했다.
그리고 좋았다.
그 두 감정이 같이 왔다.
한참 고민하다가 예나는 답장을 보냈다.
미안해요. 제가 좀 정신이 없었어요.
답장이 바로 오지 않았다.
그 몇 분이 이상하게 길었다.
그리고 곧 메시지가 왔다.
그럴 수 있죠. 부담 주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예나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
부담.
그 단어가 이상하게 마음을 건드렸다.
해원이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오히려 해원은 너무 좋았다.
문제는 그 좋은 감정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나는 답장을 못 했다.
대신 휴대폰을 가슴 위에 올려놓고 천장을 바라봤다.
창밖에서는 차 소리가 났다.
방 안에는 어둠이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한편 해원은 자신의 방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휴대폰은 책상 위에 엎어져 있었고, 노트는 펼쳐져 있었다.
원래라면 오늘 일어난 일을 차분히 정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정리가 되지 않았다.
펜을 들고 한참 앉아 있다가 결국 첫 줄을 적었다.
일기.
망한 건가.
해원은 그 문장을 적고 한숨을 쉬었다.
다시 읽어봐도 너무 솔직했다.
하지만 지우지는 않았다.
오늘 예나가 아침에 먼저 갔다.
밥도 안 먹고 갔다.
좀 더 있다 가라는 말도 안 들었다.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그런가 싶었다.
그럴 수 있다.
나도 사실 부끄러웠다.
그런데 하루 종일 연락이 없으니 슬슬 걱정이 된다.
내가 뭘 잘못했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닌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뭔가 실수했을 수도 있다.
사람은 원래 자기 실수는 잘 모른다.
일단 가능성을 정리해 본다.
해원은 여기까지 쓰고 잠시 멈췄다.
가능성을 정리한다는 표현이 너무 현장 보고서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미 펜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첫 번째.
너무 긴장해서 말을 이상하게 했다.
가능성 있음.
나는 긴장하면 쓸데없는 말을 하는 편이다.
어제도 그랬을 수 있다.
두 번째.
너무 조심하다가 오히려 어색하게 만들었다.
이것도 가능성 있음.
조심하는 것도 과하면 상대를 불편하게 할 수 있다.
세 번째.
배려가 부족했다.
제일 걱정되는 부분이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예나는 아닐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내가 너무 내 기준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네 번째.
너무 빨랐다.
아니 그런데 먼저 같이 있자고 한 건 예나였다.
그렇다고 책임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나이가 내가 더 많다.
내가 더 잘 살폈어야 한다.
다섯 번째.
너무 늦었다.
무슨 말인가 싶지만 이것도 가능성은 있다.
그동안 내가 너무 조심해서 예나가 답답했을 수 있다.
손도 못 잡고 몇 주를 버틴 남자라니.
나라도 좀 답답했을 것 같다.
해원은 펜을 멈추고 이마를 문질렀다.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너무 빨랐을 가능성과 너무 늦었을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했다.
연애는 현장보다 어려웠다.
현장은 자재가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는지 안 들어가는지 보면 답이 나왔다.
사람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해원은 다시 적었다.
여섯 번째.
내가 자면서 코를 골았다.
이건 꽤 가능성 있다.
요즘 피곤하면 코를 곤다.
만약 첫날부터 코를 골았다면 상당히 치명적이다.
일곱 번째.
내가 자면서 침을 흘렸다.
기억은 없지만 배제할 수 없다.
여덟 번째.
속옷.
해원은 여기까지 쓰고 펜을 멈췄다.
한참 노트를 바라봤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렸다.
"아니겠지."
하지만 펜은 다시 움직였다.
아니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사람은 의외의 부분에서 정이 떨어지기도 한다.
분명 어제 나름 멀쩡한 걸 입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아주 자신 있지는 않다.
다음부터는 신경을 써야겠다.
근데 다음이 있기는 한 건가.
여기까지 쓰고 해원은 결국 웃었다.
웃기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다.
서른 중반 남자가 첫날밤 다음 날 속옷 반성을 하고 있다니.
상우가 알면 한 달은 놀릴 것이다.
기옥은 아마 평생 놀릴 것이다.
해원은 노트를 덮으려다가 다시 펼쳤다.
그리고 조금 더 적었다.
농담처럼 쓰고 있지만 사실 걱정된다.
예나가 후회하는 건 아닐까.
내가 부담이 된 건 아닐까.
혹시 내가 너무 좋아하는 티를 냈나.
아니면 반대로 너무 안 낸 건가.
나는 예나가 좋다.
많이 좋다.
그런데 그래서 더 어렵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실수해도 괜찮다.
미안하면 끝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는 실수는 오래 남는다.
그 사람 마음에 오래 남을까 봐 무섭다.
해원은 펜을 내려놓았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예나였다.
네. 잘 들어왔어요. 오빠도 괜찮아요?
해원은 화면을 한참 바라봤다.
괜찮냐는 말.
별것 아닌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안도감이 밀려왔다.
살았다.
정말 그렇게 느껴졌다.
해원은 답장을 썼다.
저는 괜찮습니다.
보내고 나서 곧바로 후회했다.
너무 딱딱했나.
아니면 너무 괜찮은 척 같았나.
아침에는 조금 걱정했습니다.
그 문장을 보내고 나서도 해원은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몇 분 뒤 예나의 답장이 왔다.
미안해요. 제가 좀 정신이 없었어요.
해원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
정신이 없었다.
그 말이 다행이면서도 또 걱정됐다.
해원은 한참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답장을 보냈다.
그럴 수 있죠. 부담 주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보내고 나서 해원은 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노트를 봤다.
아까 적었던 속옷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해원은 펜을 들고 마지막 줄을 적었다.
그래도 내일은 속옷을 좀 사야겠다.
가능성은 낮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그 문장을 쓰고 나서 해원은 혼자 웃었다.
그날 밤 해원은 한참 동안 잠들지 못했다.
예나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에서 서로를 생각했다.
한 사람은 자신이 너무 빨리 도망친 건 아닐까 걱정했고, 한 사람은 자신이 뭘 잘못한 건 아닐까 걱정했다.
사실 둘 다 틀렸다.
예나는 해원이 싫어진 것이 아니었다.
해원도 예나를 부담스럽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같은 밤을 지나왔고, 같은 마음 앞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겁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겁마저 이미 사랑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