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이었다.
임해원은 작업용 장갑을 벗어 트럭 적재함 위에 올려놓고 목을 좌우로 천천히 돌렸다.
목에서 뼈 소리가 났다.
오늘은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났다.
원래는 네 시나 다섯 시까지 보고 있던 현장이었다.
층간 이전이었다.
아래층 사무실을 비우고 위층으로 옮기는 작업.
물량도 적지 않았다.
회의실 테이블만 해도 몇 개였고 파티션도 꽤 많았다.
그래서 아침에 현장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오늘은 늦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훨씬 빨리 끝났다.
"팀장님."
상우가 다가왔다.
"마지막 자리까지 세팅 끝났습니다."
"의자는?"
"전부 맞췄습니다."
"캐비닛."
"잠금 확인했습니다."
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상우가 웃었다.
"오늘은 진짜 일찍 끝났네요."
"그러게."
원래라면 아직도 짐 나르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김재헌이었다.
재헌도 해원과 같은 팀장이었다.
다만 맡고 있는 팀이 달랐다.
같은 현장에 들어오면 구역을 나눠 작업하는 경우가 많았고 오늘도 그랬다.
재헌이 웃으며 다가왔다.
"해원 씨."
"네."
"오늘 몇 시 예상하셨어요?"
해원이 시계를 한번 봤다.
오후 두 시.
"저는 네 시 정도 생각했습니다."
"저도 그 정도 봤는데."
재헌이 웃었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끝났네요."
"그러게요."
"최소 두 시간은 벌었습니다."
"그건 재헌 씨 팀이 빨리 끝낸 덕분이지요."
"거봐요."
재헌이 바로 받아쳤다.
"제가 파티션 칠 때 사람 좀 지원해 달라고 했잖아요."
"지원해 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해원이 웃었다.
"파티션 몇 장 치는데 무슨 사람까지 지원해요."
"알아서 하셔야지."
재헌도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하셔도 결국 붙여주셨잖아요."
"그래도 빨리 끝난 건 사실이네요."
둘 다 웃었다.
원래 저랬다.
둘 다 팀장이었고.
둘 다 현장을 책임지고 있었고.
둘 다 동갑이었다.
그래서 적당히 존중했고 적당히 농담했다.
"형."
기옥이 생수병을 들고 다가왔다.
"오늘 일찍 끝났는데 회식 안 해?"
"우리 기옥이."
해원이 웃었다.
"이번 주에만 회식 두 번 했으면 충분한 거 아니냐."
기옥도 바로 납득했다.
"그건 그렇네."
"오늘 같은 날은 그냥 들어가."
승건이 웃었다.
"형님은요?"
해원은 생수병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난 맥주 한잔."
상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인정입니다."
"오늘 진짜 덥긴 더웠습니다."
"창고에서 짐 내릴 때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해원도 같은 생각이었다.
집에 가서 씻고.
에어컨 틀고.
시원한 맥주 한잔.
그 정도면 충분한 하루였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도윤이었다.
해원은 화면을 보자마자 웃음이 났다.
전화를 받기도 전에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왜."
"끝났냐?"
"끝났다."
"좋네."
"뭐가."
"술."
해원이 웃었다.
"너는 인사도 없냐."
"남자끼리 무슨 인사냐."
"그래서 술."
"싫다."
"오늘 아는누나 가게 오픈했어."
"축하한다고 전해."
잠시 침묵.
그리고 도윤이 말했다.
"야 그래도 오픈 첫날인데 사람 하나도 없으면 좀 그렇잖아."
해원은 피식 웃었다.
도윤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거창하게 챙기지는 않는다.
그냥.
첫날인데 휑하면 좀 그렇지 않냐.
그 정도.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말에는 약했다.
게다가 안 그래도 맥주 생각이 나던 참이었다.
"안 그래도 맥주 생각은 났다."
"거봐."
"누나도 긴장했을 텐데 얼굴이나 비춰주고 한잔하고 오자."
해원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주소 보내."
"역시 내 친구."
"끊어."
가게에 도착한 건 한 시간쯤 뒤였다.
입구에는 화분이 여럿 놓여 있었다.
성공을 기원합니다.
대박 나세요.
번창하세요.
누군가의 시작을 응원하는 말들은 늘 비슷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도윤이 먼저 손을 흔들었다.
"누나."
카운터에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시끄럽게 들어오네."
"축하드립니다."
"말만 하지 말고 돈 써."
"그래서 손님도 데려왔잖아."
도윤이 웃으며 해원 쪽을 가리켰다.
사장이 해원을 한번 바라보더니 도윤에게 물었다.
"근데 이분은 누구셔?"
"내 친구."
"아, 친구분이야?"
해원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사장이 웃었다.
"도윤이 친구분이면 고생 많으시겠네요."
해원도 웃었다.
"저도 가끔 그런 생각합니다."
사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도윤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왜 처음 만나자마자 둘이 나를 욕해."
"욕은 아니고 사실을 말한 거지."
"누나까지 왜 그래."
가게 안에 웃음이 번졌다.
해원은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손님은 많지 않았다.
금요일 저녁치고는 한산했다.
도윤은 사장과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인테리어는 얼마 들었는지.
가게는 어떻게 구했는지.
왜 이제야 말했는지.
둘은 몇 년은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쉬지 않고 떠들었다.
해원은 맥주를 주문한 뒤 휴대폰을 꺼냈다.
원래 그런 습관이 있었다.
일기도 썼고.
글도 끄적거렸다.
사람을 관찰하는 걸 좋아했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할까.
왜 저 사람은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런 생각들을 적어두곤 했다.
그때였다.
맥주를 가져다주던 여자 알바생이 슬쩍 휴대폰 화면을 보더니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적었다 지웠다 하시던데 글 쓰세요?"
해원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처음으로 제대로 얼굴을 보게 됐다.
예쁜 사람이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었다.
키는 크지 않은 편이었지만 작아 보이지도 않았다.
얼굴이 작은 편이었고 다리가 길었다.
그래서 가만히 서 있어도 실제 키보다 조금 더 커 보였다.
어깨 위로 가볍게 내려오는 단발머리.
하얀 피부.
또렷한 이목구비.
누가 봐도 첫인상이 좋은 얼굴이었다.
검은 앞치마 아래로 보이는 옷은 단정했다.
목 부분이 살짝 넓게 파인 옷이었는데 덕분에 쇄골선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있었다.
해원은 원래 그런 부분을 보는 편이었다.
손을 보거나.
눈을 보거나.
가끔은 쇄골 같은 걸 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이상하게 그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예쁘네.
해원은 그 정도 생각만 했다.
사실 그걸로 끝이었다.
외모가 마음에 든다고 해서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분명한 건.
첫인상은 좋았다.
그리고 웃을 때 더 예뻤다.
"글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고요."
"그럼 뭔데요?"
"그냥 습관이에요."
"무슨 습관이요?"
"일기 쓰고. 생각나는 거 적고. 사람들 보면서 떠오르는 거 적고."
여자 알바생은 생각보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기하다."
"뭐가요?"
"보통 손님들은 게임하거나 영상 보잖아요. 근데 아까부터 계속 뭔가 적고 계시길래 소설가인 줄 알았어요."
해원이 웃었다.
"소설가는 아닙니다."
"그럼 뭘 그렇게 적어요?"
"사람 이야기."
"사람 이야기요?"
"네."
"사람이 재밌거든요."
여자 알바생은 잠시 생각하더니 웃었다.
"저도 그런 거 좋아하는데."
"뭐를요?"
"사람 사는 이야기요."
"커뮤니티 같은 거 맨날 봐요."
해원이 웃었다.
"어떤 거요?"
"연애 이야기. 고민 이야기. 결혼 이야기. 그런 거요."
"저도 봅니다."
"진짜요?"
그 순간.
해원은 생각했다.
오늘 맥주 한잔만 마시고 갈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오래 앉아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