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세계를 보지 않았다.
자신을 돌아 보느라 바빴다.
조선의 사유(思惟)는
세계의 다양성을 이해하기보다, 자기 정통성을 확인하는 데 몰두했다. 외부 세계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 부정이었고, 자기 부정은 불경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문명은 늘 내향적으로 흘렀다.
외교조차
‘예의 외교’였고, 기술조차 ‘도덕의 도구’였다. 조선은 자신을 문명이라 믿었지만, 그 문명은 점점 현실과 분리되었다. 이 단절의 시작점에 바로 ‘사유의 근대’를 거부한 조선 왕조가 있었다.
조선의 지성(知性)은
변화보다 순수함을, 진보보다 완결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순수한 체계는 언제나 타락한다.
조선의 주자학(朱子學)은
스스로의 도덕적 무게에 짓눌렸고, 이성의 진보가 아닌 '예의 반복'으로만 생명을 연장했다.
근대적 사유(思惟)가
스스로를 확장하며 진리를 새로이 발견할 때, 조선은 ‘이미 아는 것’을 다시 정리하며 안심했다. 그 안심이 바로 조선의 평화였고, 동시에 조선의 마비였다.
사유(思惟)가
순수 할 수록, 현실은 멀어졌다. 도덕의 세계가 완벽해질수록, 인간의 세계는 무너졌다.
조선의 가장 큰 비극은
‘깨달음의 순간’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데 있었다. 정약용도, 박지원도, 심지어 정조 조차도 사유의 한계선을 넘지 못했다.
그들은
‘사유(思惟)의 근대’ 문턱에 서 있었으나, 들어서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문 안에는 주자학의 핵심인 ‘예(禮)'의 해체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사유의 근대를 이해할 만큼 똑똑했지만, 받아들일 만큼 용감하지는 못했다. 왕조의 도덕은 강했으나, 정신은 겁이 많았다.
결국 조선은
새로운 세계를 보면서도, 자신들이 만든 옛 세계의 질서에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