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 마시는 차에 관한 정보교환 및 추천, 남녀노소 모두 차를 중심으로 차에 관한 이야기와 차 나눔, 시음기 등 활발한 온라인 교류를 통해 다도 및 차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나누는 곳 입니다. 나이, 성별, 지역에 상관없이 자신이 즐기는 차를 공개하고 시음기를 올리어 차에 관한 담소를 나누는 카페입니다. 차상인은 정중하게 사양합니다.
경기도
음식/음료
Nayamuru
인증 30회 · 1개월 전
2021년 대홍포
2021년 대홍포
호부가 갈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구수한
무이암차의 대명사 대홍포. 분주한 마음에 보리차 우리듯 머그컵에 잔뜩 우려 음료처럼 마신다. 꽤 품질이 좋은 대홍포인데 티백처럼 대해 미안하기도 하고 늘 가까이 있어 귀한 줄 모르고 마신다.
벼랑 끝에서 피어난 붉은 전설, 대홍포를 마주하며
찻잔 속에 담긴 수색(茶色)이 예사롭지 않다. 태평후괴가 맑은 숲의 눈동자 같고 철관음이 황금빛 들판 같다면, 대홍포는 잘 익은 대추 빛깔이나 깊은 가을 산의 노을을 닮았다. 무이산(武夷山)의 험준한 암벽, 그 척박한 바위 틈바구니에서 뿌리를 내리고 버틴 차 나무의 눈물이 이토록 진한 빛깔을 만들어낸 것일까.
대홍포를 우릴 때는 차분한 기다림이 필요하다. 찻잎은 검고 구부정하게 말려 있어 마치 오래된 고목의 껍질 같다. 하지만 뜨거운 물이 닿는 순간, 그 투박한 껍질 속에서 잠자던 수백 년의 시간이 깨어난다.
바위의 뼈, 암골화향(巖骨花香)
대홍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암운(巖韻)'이다. 첫 모금을 넘기면 입안 전체를 감싸는 것은 꽃향기보다 먼저 다가오는 묵직한 바위의 기운이다. 서늘하면서도 단단한 기운이 혀를 누르다가, 이내 그 뒤를 따라 은은한 난초 향과 잘 구운 빵의 고소함이 겹겹이 층을 이룬다.
사람들은 이를 '암골화향', 즉 바위의 뼈 위에 핀 꽃의 향기라 부른다. 겉은 강인하고 속은 부드러운 외강내유(外剛內柔)의 전형이 바로 이 찻잔 속에 있다.
붉은 도포를 입은 치유의 힘
전설에 따르면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의 병을 고쳐주어, 장원급제한 그가 고마움의 표시로 차 나무에 붉은 도포(大紅袍)를 입혀주었다고 한다. 그 전설은 단순히 차의 효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게다. 벼랑 끝에 매달려 비바람을 견디고, 바위의 미네랄을 온몸으로 받아낸 차 한 잔이 지친 영혼에게 건네는 뜨거운 위로를 뜻하는 것이리라.
긴 여운, 마르지 않는 샘물
대홍포의 가장 큰 미덕은 '회감(回甘)'에 있다. 차를 다 마시고 난 뒤에도 목 안쪽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달콤한 기운. 그것은 마치 인생의 쓴맛을 다 본 뒤에야 찾아오는 뒤늦은 성취감처럼 깊고 길다.
오늘처럼 삶의 무게가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날, 나는 대홍포를 우린다. 바위 틈에서도 끝내 꽃을 피워낸 저 찻잎의 기개를 빌려, 내 안의 눅눅한 마음들을 바짝 말려보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