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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서울시 서초구
문화/취미
시온
인증 31회 · 2일 전
엄마가 '청춘은 지금賞'을 받았다
새로운 수영장에 가는 일은 항상 재미있다. 멋지고 아름다운 먼 나라의 휴양지 수영장도 좋겠지만 입장료 3000원만 내면 갈 수 있는 각 지역 시설관리공단 산하 공공 수영장은 알차서 더 좋다.
5월 마지막 날엔 서울 도봉구 수영장을 처음 가봤다. 이곳에서 열리는 수중 에어로빅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엄마와 함께 4년간 수영장에서 헤엄치며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엄마의 인생을 담은 책을 냈었다. 그때 책 표지 사진 속에서 엄마가 썼던 수영 모자 브랜드가 이 대회를 개최했다. 수영장을 통째로 대관해 1부에 자유수영을 주제로 한 낭독극 공연, 2부에 어린이 물 적응 놀이, 3부에는 모든 세대가 참여하는 수중 에어로빅 행사를 열었다.
도보 생활자인 나는 쳇바퀴 도는 일상에서 웬만한 곳은 걸어서 오간다. 그런 나에게 지하철로 한 시간 걸려 원정 수영을 가는 길은 여행처럼 설렜다. 청량리를 지나 지하철이 지상으로 나오는 구간에서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등산객이 심심찮게 보였다. 우리의 목적지는 도봉산과 수락산을 양쪽에 거느린 등산 명소이기도 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천변을 따라 수영장으로 걸어가는 길에는 이파리가 얼핏 비슷하게 보이는 복숭아나무며 대추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엄마, 대추나무엔 뭐가 걸렸게?” 엄마는 무심히 “대추가 열리지”라고 했다. 나는 “대추나무엔 사랑이 걸리지요” 하고 신소리를 했다. 다음 대추나무를 마주쳤을 때 다시 물어보니 엄마는 “사랑이 걸렸나?” 하고 장단을 맞췄다.
그렇게 도착한 수영장. 동글동글한 꽃무늬 수영 모자를 쓴 사람들 수십 명이 입수해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강사로 나선 이 브랜드 대표는 원피스 수영복 위에 발레 치마를 두른 익살스러운 차림이었다. 그가 킥판을 쥔 채 브루노 마스의 노래에 맞춰 목과 손목을 돌리자 참가자들도 동작을 따라 하며 함께 몸을 풀었다. 수영장은 1층에 있었고, 창문이 아주 컸다. 정신없이 춤을 추는 동안 수면 위로 햇살이 쏟아졌다. 주말 오후 수영장 물 표면에 빛이 일렁이는 것을 보고 있자니 살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 기뻤다.
열두 명이 한 줄로 서서 앞에서 뒤로 작은 플라스틱 공을 옮기는 게임도 하고, 윷놀이 말처럼 수영장 네 귀퉁이에 조원들이 서 있다가 릴레이로 수영하기도 했다. 상품을 앞에 두고 게임을 하면 어쩔 수 없이 긴장하게 되는 게 우린 영락없는 한국인이다. 오리 튜브를 타고 이 꼭짓점에서 저 꼭짓점으로 빠르게 나아가는 선수 중 누가 이겼나 구경하느라 엄마는 목을 쭉 뺐다.
몇몇 사람이 책 표지랑 똑같은 노란 꽃무늬 모자를 쓴 엄마를 알아본 것처럼 나도 정자 선생님을 한눈에 알아봤다. 흰 바탕에 빨간색·보라색이 섞인 알록달록한 꽃 모자에 검은색 U자 수영복을 입고 엄마처럼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선생님은 이 브랜드의 일반인 시니어 모델로, 우리의 롤모델이었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것에 익숙지 않은 일반인 중년 여성이 모델이 되려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선생님 사진을 보며 연구했던 것이다.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한 이 브랜드 대표는 전문 모델 대신 일반인인 노년 여성이 자사 제품을 착용한 광고를 기획했다. 수영장에선 누구나 자기만의 속도로 즐거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SNS에서 광고를 본 손녀가 대신 응모해 수영 모자 모델이 됐다. 오래 수영을 즐긴 동네 고수라고 한다.
“모자 선생님이시죠!” 인사하며 선생님을 모시고 온 손녀와 대화를 나눴다. 정자 선생님은 1940년생, 엄마는 1960년생으로 딱 스무 살 차이였다. “인생 살아보니 알 수 없어요. 별일이 다 생겨요.” 선생님의 손녀는 유명인이 된 할머니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60대인 엄마가 이런 방식으로 세상에 나아갈 줄은 나도 몰랐다.
유은실의 소설 ‘순례주택’의 주인공인 75세 건물주 김순례씨는 ‘순하고 예의 바르다’는 뜻으로 어른들이 지어준 ‘순례(順禮)’라는 이름을 ‘순례(巡禮)’라고 스스로 바꾼다. 그가 좋아하는 말은 ‘관광객은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는 것. 나머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겠다는 다짐을 하며 순례씨는 미래를 꿈꾼다. 이날 대회에서 정자 선생님은 ‘왕언니상’을, 엄마는 ‘청춘은 지금상’을 받았다. 상품으로 받은 대나무 휴지를 들고 중랑천을 건너며 백로를 봤다. 가을엔 수락산 등산을 하자고 약속했다. 즐거울 일은 앞으로도 한참 남았다.